*스포주의
한국인이 아카데미상을 받으니 기분이 좋다. 국운이 다시 오르는 느낌도 든다. 영화를 보며 써둘만한 것이 있었다.
1. 계단과 계급, 상승과 하강, 빛과 어둠, 유희와 잔혹 - 설국열차의 '업그레이드'판
기생충은 일단 대중적으로도 재밌는 영화다. 아카데미와 칸 영화제에서 모두 상을 받는 건 대단한 일이다.
대중적으로 재밌으려면 미적 구성보다는 줄거리의 구성과 그것을 풀어내는 데에 긴장을 놓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생충은 그 줄거리의 탄탄함과 긴장의 유지에서도 탁월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미적 구성으로도 주제를 다층적으로, 또한 자연스럽게 구성하는 데에 성공적이었으므로 이 영화는 명작이다.
계단을 통해 카메라와 인물들은 영화 내내 오르내리며 계급을 공간적으로 보여주는데, 반지하는 마치 김중식 시인의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에 나오는 '세상의 끝' 같은 느낌으로, 영화의 모든 공간들 중에서 가장 아래에 있다. 심지어 부잣집 비밀 벙커가 반지하보다는 높으니 그 곳에서 사는 사람이 '살만하다'고 하지 않는가.
이 높은 곳과 낮은 곳은 경제적인 계급을 가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빛과 어둠, 유희와 잔혹, 순수와 타락을 가르기도 한다. 높은 곳은 당연히 밝으며, 영화 내내 빛과 어둠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홍수로 반지하의 조명마저 깜빡거릴 때, 불안한 깜빡거림의 불안 속에 있던 아버지도 있었지만, 아예 어둠 속에서 수석을 바라보던 아들은 어둠에 완전히 먹혀버렸는데, 생활 속에서 '상징'을 찾아내고 아버지에게 '연기'(사기)를 가르치던 그 안의 '순수'한 꿈은 '잔혹'하게 '타락'해버린 것이다.
반면에 부잣집에서도 가장 높은 2층에 사는 아이들의 꿈은 정말 꿈처럼, 유희와 순수 속에서 타락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 같은 대상이어도 그것이 밝고 높은 곳에 있느냐, 어둡고 낮은 곳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쓰임을 이 영화는 계속 말한다; '수석'은 '부귀와 명예'를 상징할 수도, '살인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미술'은 '꿈을 펼쳐보이고 마음을 드러내는 도구'일 수도, '문서를 위조'하고 '타인의 심리를 악용'하는 도구일 수도 있다. '짜빠구리'는 '가끔 먹는 별미로서 한우랑 같이 먹으면 더 맛있는 음식'일 수도, '(라면은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지겹게 먹는 것이지 맛을 위해 섞어먹는 것이 아니므로)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그게 뭐야?'라고 반문하는 음식'일 수도 있다. '벙커'는 '전쟁 때에나 어쩔 수 없이 공포 속에 들어가는 곳'일 수도, '전쟁이 아니더라도 이미 전쟁 같은 바깥 세상이라는 지옥을 피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안식처'일 수도 있다.
어느 집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아름답고 귀여웠던 '상징'과 '계획'들은 점점 더 거창하고 밝게 자랄 수도, 점점 더 쪼그라들어 '무계획'이 되거나 '타락한 계획'이 되거나의 선택으로 변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더해 영화는 인종 간 차별 문제도 살짝 건드리는데, '인디언 복장을 하고 캠핑을 하며 화살과 도끼를 들고 다니는 놀이'는 한국 부유층 아이에게는 '미국 문화를 경험하는 과정'이자 '가벼운 일탈'일 뿐이지만, 인디언 문화가 그렇게 유희로만 흔적처럼 남게 된 과정은 백인이 다른 인종들의 위에 군림하기 시작하던 시대의 인종 학살이었다. (인디언과 같은 황인종이 상류층에 편입되기 위한 표식으로 인디언 놀이를 하는 건 '상징적'이다) 아버지가 벙커에 갇히고 난 후, 부잣집의 집주인이 독일인으로 바뀌는 것도, 한국 땅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언어를 가르는 기준이 영어가 되는 장면들도 감독이 무엇인가 의도한 게 아니었을까? 설국열차도 다분히 인종적인 메세지를 담은 영화였다 - 그게 아니라면 백인 흑인 천지인 기차에 동양인 부녀가 왜 그렇게 중요했고, 살아남은 것도 동양인 소녀와 흑인 소년이었을까? 어쨌든 영화는 인종에 대해서는 깊이 들어가진 않지만, 한국의 계급 구조를 세계로 확장시켜보면 그곳엔 인종의 문제도 당연히 얽혀 있다.
어쨌든 보통 영화나 매체에서는 부자를 악인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영화 속 대사처럼 '부자니까 착한 거야'가 그럴듯하게 들릴 때도 많다. 아들이라고 처음부터 사기꾼으로 태어났을까. 부자들이 돈 뿐만 아니라 도덕적 우월성까지 가져갔을 때, 빈자인 아빠는 인간적으로 처참함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자신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 못지 않은데, 그 사랑은 나보다 못해 보이는 부자 아빠는 가족에게 모두 다해줄 수 있는 부와 수단을 갖고 있고, 자신은 해줄 수 있는 게 없이 자식들에게 얻어먹고 있으니. 그래서 반복해서 부자 아빠에게 '부인을 사랑하느냐'고 물을 수 밖에 없다. 그것만이 자신을 '기생충'이 아닌, 부자 아빠 앞에서도 떳떳하게 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질문이니까. 그리고 사장이 느끼기엔 그 질문만이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 벙커의 고시생 남편은 스스로 자동 기계가 되어 사장이 올 때마다 등을 이마로 켜고 리스펙트한다. 설국열차에서 톱니바퀴 속에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꼬마와 이어지는 장면이다. 만약에 기술이 더 발달하여 더욱 자동화가 된다면, 실업자가 된 그 많은 사람들은 무얼 하며 살아갈까? 무의미한 기생충보다는 그 속에서라도 이마로 버튼을 찍으며 보람을 찾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어둠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찾아 몸부림치는 한 모습이다. 그것조차 좌절되면 폭주하지만.
* 아이 그림의 '스키조프레니아 존'은, 원래는 없던 것이어야 할 어둠의 기생충을 빛의 아이가 처음 봤을 때의 충격에서 생겨났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특히 부유하게 자란 아이들은 처음 가난을 목격했을 때의 충격이 다들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그 아이 스스로나 주변에서 그 가난과 어둠의 존재 자체를 '병'처럼 보고 지우려 한다. 어릴 때부터 물질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계급은 '격리'되어 공고해진다. ("너도 공부 열심히 안하면 저렇게 힘들게 살거야")영화에서는 다른 기생충이 그 '스키조프레니아'를 치료하고 그 원인이 되는 기생충을 쫓아내고 죽이기까지 하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러지 않은가? 가난한 사람끼리 싸우고 죽이는 일이 훨씬 많은 법이다.
* 봉준호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혁명의 대상이 모호한 시대'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그런 대규모 혁명의 말로는 소설로는 '동물 농장'에서, 역사로는 수도 없이 보여줬다; 타락과 반복. 혁명의 대상은 물질과 계급이 아니라, 그것을 연기하는 인간 자체여야 한다.
* 처음과 끝 장면이 천장에 매달린 양말인 점은, 설국열차에서 총리가 머리 위에 신발을 올리며 '니 자리를 알라'라고 외치는 장면과 상통하며 더욱 은밀하게 드러난 '상징'이다. 누군가에게는 발 밑에 있어야 할 양말과 지면의 높이가, 누군가에게는 머리 위에 매달린 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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