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개념2019. 9. 7. 18:17
세상의 모든 돈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과 지식을 얻은 삶
Vs
그런거 하나도 없는 거지같은 삶이지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정확히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삶 (물론 여기에 돈 권력이 붙으면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이 양자택일에서 후자를 택할 수 있어야 매니아라 불릴만 하다. 공자님은 이 같은 선택을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라 하였으며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만을 구하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인간과 세계를 이루는 영혼백육물에서 영혼을 버리고 육물의 만족을 택하느니 영혼의 구원을 택하자는 것이다.

또 달리 말하면, 전자의 삶에서는 인간의 에고와 그것이 인식하는 세계 전체인 생각과 감정과 오감, 그것들의 요구 즉 욕망을 만족시켜 일시적인 평안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 평안은 오래가지 않으며 또다시 본질상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욕망을 만족시키러 물질과 쾌락을 끝없이 갈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구한다고 구할 수 있지도 않으며, 운과 다른 사람의 희생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목적 없는 챗바퀴를 돌리는 지옥이자 욕망에 속박된 노예의 삶이다.
반면 후자의 삶은, 욕망의 추구가 본래 생각 감정 오감의 조건을 만족시킴으로써 일시적 열반락의 간접 체험을 목표로 한 것이므로, 생각 감정 오감의 조건을 거치지 않고 직접 그 근본의 참나(존재 자체이자 인식 자체)에 만족하는 견성, 선정의 방식으로 언제든지 원하는만큼 열반락을 얻는 방식의 삶이며, 생각 감정 오감의 모든 세계를 참나로 포함하여 관조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나 스스로를 해하지 않듯이 목적과 선악이 뚜렷해지는 삶이다.
전자의 삶은 지금은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아도 스스로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카르마를 경영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운의 변화, 외부 조건의 변화에 따라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으며, 선정을 모르므로 조건에 관계없는 평안을 누리지도 못하여 외부 조건에 철저히 매달리다 삶을 스스로 파괴한다.
후자의 삶은 지금은 비록 아무것도 가진 바 없어도 목적과 선악이 뚜렷하므로 카르마를 제대로 경영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으며,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생각 감정 오감을 다루는, 욕망을 제대로 갖고 노는 진정한 삶의 주인공이 되는 삶이다.

전자는 자해해타의 삶이요, 후자는 자리이타의 삶이다. 전자는 스스로는 자리, 즉 자기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욕망에 휘둘림으로써 참된 나로부터 나오는 양심을 외면하고, 본래 세계를 포함하던 참나에서 "나"의 범위를 지극히 좁은 몸의 범위로 좁혀 조그만 조건의 변화에도 괴로와지도록 하며, 선악을 모르므로 주변에게 피해를 끼쳐 결국 그 인과를 다시 받게 되니, 자기 자신을 해하고 있다.
반면 후자는 억지로 이타적인 위선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위선은 위악보다 더 나쁜 결과를 줄 때가 많다. 위악은 선악의 구분을 뚜렷하게 하지만 위선은 선악의 구분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나"의 인식을 항상 생각 감정 오감의 뿌리인 참나에 둠으로써, 나와 남을 따로 분리하지 않으니 내가 나 스스로를 해하지 않듯이 자연스레 남을 해하지 않는 것 뿐이며, 따라서 모자람도 과도함도 없이 카르마를 경영하면 나와 남이 구분없이 모두 이로워진다.

그리고 인과의 바깥이 없다는 성인들의 공통된 말씀을 볼 때(심지어 경제학조차도 가장 중요한 법칙 중 하나가 "꽁짜 점심은 없다"이다), 원인없는 결과가 가능한 체계(system, world)는 논리적으로 붕괴된 혼돈 뿐임을 볼 때, 권력 돈 명예 쾌락은 결코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은 아니다. 한 사람에게 자원이 과도하게 집중되었을 때, 그 사람이 그것을 올바르게 쓰지 못하면 그 과보는 그 사람이 갖지 못했을 때보다 훨씬 커지기 때문이다. 마치 아이가 장난감을 들고 있을 때보다 칼을 들고 있을 때 위험한 것과 같다. 나의 선악 판단 능력이 부족할 때에는, 세상이 아무리 원하는 것이더라도 돈 권력 명예 쾌락을 얻는 것을 두려워하자. 선악판단 능력이 충분하다면 물론 더 큰 선행을 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능력 밖의 복은 복이 아니라 재앙의 시작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옛부터 내성외왕이라, 성인의 그릇이어야 비로소 왕노릇할 수 있다 하였다. 장자 1장이 소요유로 노닐며 시작하다 7장의 응제왕으로 세상을 경영하며 끝나는 이유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었던 성인들도 거지 백수로 핍박받으며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Posted by SP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