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텅빈 자리에 맡기고 양심을 따르며 도를 닦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가장 바른 길일 뿐더러 결국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일단 견성이라 부르든 성령체험이라 부르든 깨어있음이라 부르든 그 자리에 맡겨본 사람은, 맡기지 않고 에고로 고민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괴롭고 어리석은 일임을 알게 되어,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기 싫게 된다. 무한한 위안을 주는 그 자리가 아니면 그 어떤 성인도 세상의 괴로움을 도무지 이겨낼 도리가 없다. 진리는 억지로 괴롭게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진리를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진리를 알게 되면 다른 길이 없음을 너무나 자명하게 느껴서, 기꺼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성현은 억지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밖의 길은 스스로부터가 너무나 힘들고 소득없는 길임을 자명하게 알기에 그냥 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마치 사람들 뿐 아니라 짐승들도 뜨거운 불이나 낭떠러지에 몸을 날리지 않는 것과 같다. 선을 따르지 않음은 진리를 아는 자리에서 보면 그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지만, 이른바 깨어있게 된 사람이라도 습관대로 불 속에 손을 넣고 낭떠러지에 구르기 마련이다. 이런 습을 조금씩 바꾸는 것이 모든 삶의 궁극 과제이다. 그 지난한 과제를 양심이라는 길잡이와 무한한 평안없이 어찌 헤쳐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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