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 『수심결』[1]과 『정혜결사문』[2]을 통해 고찰하는 깨달음

 

진리란 무엇인가? 현대 문명 사회에서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일종의 과학적, 혹은 논리적 탐구에 대한 요구이다. 즉 진리란 과학적 귀납 추리나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밝혀져야 할 빛이고, 우리는 이 빛을 구함으로써 어둠에 둘러싸인 저 광활한 자연과 우주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3] 그러나 불교에서는 진리가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일단 진리를 ‘탐구한다’거나 ‘안다’는 말을 쓰기보다 ‘깨닫는다’라는 말을 더 교리에 맞는 것으로 한다는 점이 그렇다. 깨달음은 아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것은 뒤에서 자세히 살피겠지만, 논리적으로 근거를 찾아 대거나 정해진 순서를 밟아 정해진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닌, ‘한 번에 진리에 이르는 것’ 즉 ‘돈오’의 의미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관점에서는 진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이들은 ‘입으로는 진리를 떠들지만 그 마음은 뒤로 빠질 궁리만 하는’[4]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파도가 치는 과학적 원리를 외우고 있는 과학자와 매일 파도에 맞서 싸우는 파도타기 선수나 어부 중에 누가 파도를 더 잘 아는 것인지는 진리를 무엇으로 보는가에 따라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지눌이 말한 ‘돈오’ 이후의 ‘점수’라는, 현재의 승려 교육법에도 전해지는 깨달음의 과정에 대한 비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글에서는 먼저 근본적인 진리가 논리적 ‘앎’이 아닌 ‘깨달음’을 통해서만 밝혀짐을 고찰하고 뒤이어 지눌의 『수심결』과 『정혜결사문』을 통해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2. ‘한마음’이란 무엇인가 – 믿음체계적 사고의 도입

 

2. 1. 과학적 본질주의에 대하여[5]

 

먼저 위에서 예시되었듯이, 현대의 진리 개념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과학적 탐구에 대해 생각해 보자. 현대에서는 과학적 탐구의 결과가 가장 진실과 본질에 가까운, ‘객관적’이라는 권위를 갖고 있다. 이를 ‘과학적 본질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가령 ‘물은 무색투명하고 맛이 없으며 아래로 흐르고 안에는 물고기들이 살 수 있고…’ 등의 설명들보다도 ‘물은 H2O이다’라는 진술이 더욱 물의 본질에 가깝고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자의 설명은 인간의 감각이라는 한계에 예속되어 있어 불안정한 지칭이 되는 것이다.

좀더 생각해보자. ‘물은 H2O이다’라는 진술은 과학적 경험과 지식을 통해 얻은, ‘모든 ‘물’이라 부르는 것에는 H2O가 있을 것이다’라는 강한 추측이다. 이러한 과학적 본질주의에서 우리가 보통 ‘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넓은 의미의 어휘로서 공통적으로 ‘H2O’라는 본질에 다른 부가적인 특징들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상황에서, 만약 K라는 지역에서 ‘물’이라고 부르던(다른 물과 같다고 생각되던) 액체가 H2O가 아닌 XYZ의 분자 구조를 가졌음이 밝혀졌다고 하자.

K라는 지역의 ‘물’이 더 이상 물이 아니라는 진술은 다음을 의미한다; 첫째, K 지역의 액체에 대한 반복된 과학적 경험에서 모두 XYZ가 관찰되었으므로 그 지역의 액체는 모두 XYZ일 것이라는 추측과, 둘째, 마찬가지의 귀납적 방법을 통해 다른 지역의 기존의 물은 모두 H2O일 것이라는 추측, 셋째로 물의 본질은 H2O이므로 K 지역의 액체는 물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과학적 본질주의의 입장이 제기할만한 반론은, XYZ와 H2O의 분자 구조가 다름에도 다른 감각되는 성질들이 모두 같다는 가정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색 투명이라는 성질이나 밀도 등이 사람의 감각으로는 잘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비슷할 수 있다고 해도, 같은 종의 생물에 대해 같은 기능을 갖는 액체가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과학적 귀납에 의해 도출된 결론으로, ‘모든 물은 H2O이다’라는 진술과 같은 종류의 근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과학적 본질주의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만약 물과 다른 모든 성질에서 구분할 수 없고 분자구조만 다른 액체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물은 H2O’라고 정의하는 근거는 단지 H2O를 먼저 발견해서 명명하고 그 정의를 사용하는 언어 사용자가 XYZ로 정의하는 사용자보다 우세하기 때문이라는 등의 사용자 측면의 것이 된다. 일상 언어가 사용자의 경험 이전에 존재한다는 관점이 아닌 이상, 일상 언어의 정의는 사용자 간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즉 H2O와 XYZ는 존재하게 되지만, 그것들 중 무엇을 ‘물’로 지칭할 것인지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게 되고, 따라서 과학적 본질주의는 부정된다 – 이것은 위의 세 번째 주장을 반박한다. 만약 과학적 추론에 근거하여 XYZ 같은 액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물은 H2O이다’라는 진술은 분석 명제가 된다. 이러한 가정 하에서 ‘물’이라고 부르는 액체의 모든 공통적인 특징들을 가질 수 있는 것은 H2O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과학적 본질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과학이 딛고 있는 가정(이 경우에는 현대 화학의 가정)이 절대적 진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가정 또한 과학적 귀납 추리에 의해 얻어진 것이므로 반증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물은 H2O’라는 진술이 과학자와 일반인들 사이에 모두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정통적인 과학적 탐구 방식을 통해 이 결론을 얻은 과학자라면 이 진술의 뒤에 있는 가정들과 분자가 성립하는 구조 등을 이 진술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나, 일반인들이 이 진술로부터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어디선가 본 빨간 공 하나와 흰 공 두 개 정도의 이미지이고, 이것은 ‘물’에 대한 이미지와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본질주의가 주장하는 진리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사람들 간에 완전히 공유되지도 않는 불안정한 개념이 된다.

 

2. 2. 정신활동에 대하여 – 감각, 기억, 상상 그리고 분석성

 

이제 위의 과학적 본질주의가 가능하다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근거, 인간의 정신활동에 대해 생각하자.[6] 인간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은 현재에 국한된 감각, 과거의 경험을 돌이키는 기억, 그리고 현재와 과거에 모두 속하지 않는 상상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경험을 지각 기관과 지각 기관의 대상(감각),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식으로 나눈 부처의 십팔계와도 이어지는 것이다.[7] 우리가 과학에서든 일상 생활에서든 세계의 존재를 알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이러한 정신활동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진리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 정신활동, 특히 감각은 외부 대상의 존재를 보장하는가?

이 의문은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한 의문과도 밀접히 연결된다. 즉 정신활동이 신경계의 활동 자체라거나, 신경계의 활동과 대응된다고 하면 적어도 감각을 생성해내는 외부 대상으로서 신경계가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이 신경계에 자극을 주는 또다른 외부 대상, 더 나아가서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이 문제는 현대에도 해결되지 않은 것일 뿐 아니라, 뇌와 신경계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계속 발전하더라도 논리적으로는 완전히 풀릴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뒤에서도 자세히 다루겠지만, 우리가 이미 지각과 존재, 정신과 물질을 서로 섞일 수 없는 것, 즉 각각 그 자체로서 사유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가정 하에서는 어느 하나에 대한 탐구가 다른 하나에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 없다. 단지 반복적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추측할 뿐이다.

직접적인 감각으로 존재를 보장할 수 없다면, 우리의 상상이나 기억은 어떠할까? ‘기억’을 '감각을 직접 통하지는 않지만 알게 되는 것(현상하는 것)들 중에서, 과거에 한 번 이상 현상했던 것과 같거나 관련 있다고 유추되는 것'이라고 정의하자. 이 정의에서 떠오르는 문제는, '기억이 나타나는 방식은 감각이나 상상 등과 어떻게 다른가'와 '그것이 과거의 것이라는 것은 어떻게 유추하는가'이다. 전자를 생각하면, 감각은 기억보다 즉각적이고 강렬한 것 같다. 또한 감각은 기억보다 보통 출처가 분명하고 같은 감각 기관을 가진 개인 간에는 편차가 더 적다. 다시 말해 감각은, 그것이 외부 세계의 실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좀 더 외부의 무엇인가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감각은 인간뿐 아니라 신경계를 가진 생물들에게 삶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그 감각이 기억이 되면 현저히 그 성질이 달라진다. 나는 기억을 되살려서 과거와 똑같은 통증을 느낀 적이 없다. 똑같은 감각을 현상하려면 다시 그것을 감각하거나, 적어도 신경계에 동일한 자극을 주는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후자의 문제는 기억이 감각이나 상상과 구분되고, 현재가 감각에, 현재도 과거도 아닌 것이 상상에 대응된다면 해결되는 문제이다.

상상은 기억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간단히 말하면, 상상은 기억에서 비롯된다. 기억은 감각적 대상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상상을 통해 지각에 개입한다. 가령 용을 상상해본다고 하자. 나는 사람들이 상상한 것이 대강 비슷하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용을 직접 본 사람은 없더라도 이야기나 수많은 영상 매체들을 통해 그 성질에 대해 어느 정도 뚜렷한 합의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용에 대한 상상'은 '용에 대해 듣거나 그림을 보았던 기억'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합의되지 않은 것, 가령 ‘퓰벍’에 대해 상상해보라고 하자. 우리는 그렇게 명명된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감각한 적이 없으므로 기억이 없다. 상상하는 것 역시, 백지 상태이거나 기껏해야 그것과 발음이 비슷한 어떤 것을 기억해 내는 것이리라. 종합하면, 상상은 기억을 통한 유추이고, 감각과 달리 기억과 같은 영역의 것이다.

이러한 기억과 상상은 감각과 함께 정신활동을 이루고 있다. 즉 우리가 어떠한 관념을 갖는 것은 감각 경험만으로는 되지 않고 그것에 대한 반복적 경험과 그로부터 논리적으로 유추한 결과이며, 이 관념들 사이는 ‘총각은 미혼 남성이다’와 같이 분석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여기서 반복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이 기억이며, 유추하고 관념들을 연결하는 것이 상상인 것이다. 과학적 본질주의는 여기서 다른 상상들과 달리 과학적 탐구는 분석성으로써 경험들 간의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드러내므로 더욱 본질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이러한 분석성의 개념을 살펴보자. 여기서 분석성에 집중하려는 이유는 기억과 상상은 분석성에 기반하지 않고도 발생할 수 있으나 그 경우는 착각과 같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다루어지고 따라서 외부 대상의 존재를 보장하지 못하므로 만약 분석성이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면 자연히 지각활동 전체가 외부 대상의 존재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석적 지각, 즉 이성을 통해 경험을 일반화하고 그 성질로부터 본질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선험적 혹은 경험적 근거를 대야 하는데, 분석적 지각이 선험적 지식에 기반한다면 그것은 ‘용이 이 우주를 받치고 있다’는 진술과 다를 바가 없다. 그 필연성을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며 만약 가장 분석적이라는 수학의 예를 든다면 그것이 분석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수학적 지칭에 성공했던(‘1+1=2’라고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했던)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경험적 지식에 기반한다면, 즉 ‘지금까지의 경험을 논리적으로 일반화하여 만든 원리들이 다른 경험에도 적용될 수 있었던’ 성공적인 경험들에 근거하여 분석적 지각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가정하면, 이는 우리의 경험의 불완전성에 대한 의문과, 이성이 경험들을 일반화하여 완전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에 대한 의문에 직면하는 것이다. 후자의 의문은 우리가 버튼을 누르면 바나나가 나오는 상자에 있는 원숭이의 처지가 아닌지에 대한 의문, 곧 우리가 발견한 원리라는 것이 버튼과 바나나와의 관계일 뿐 바깥의 통제관이나 그의 의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문과 같다.

이상의 논의는 즉, 감각과 기억, 상상, 그리고 현대 과학의 근거인 분석적 지각을 통해서도 우리가 대상의 존재의 전부, 혹은 존재의 변하지 않는 본질을 ‘알았다’고 할 수 없음을, 즉 그것이 반증될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음을 뜻한다. 어쩌면 존재의 일부는커녕 우리의 정신활동이 외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필연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외부 세계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즉 정신과 물질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어 생각한다면 논리적으로는 이를 구해낼 수 없다. ‘지각과 존재가 서로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논리적 사고의 결과는, ‘지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라는 문장으로도 표현 가능하다. 따라서 이 문장 너머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그 동안 가져왔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 가정을 깨뜨려야 함을 의미하고, 논리적 사고 또한 각각의 형이상학적 가정들 위에서 펼쳐지는 것임을, 즉 객관적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세계를 객관적 관점이 아닌, 형이상학적 가정(믿음) 위에 세워진 이론들의 체계, 즉 믿음체계들의 혼재로 보려는 사고를 믿음체계적 사고라 부르도록 하고,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2. 3. 지각 주체, 즉 단일한 자아에 대하여

 

  지각이 존재를 보장하지도 않고, 거꾸로 존재가 지각을 보장하지도 않는다면, 도대체 지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되짚어보아야 한다. ‘지각하는 나’, 그 중에서도 ‘감각하는 나’는 믿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회의하는 나’는 여전히 부정할 수 없다던 데카르트에게 자아는 반성적 사유로서 그 존재가 밝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감각되는 외부 대상과도 철저히 구분되는 영혼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분석적 지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를 알 수 있다는 ‘나’는 물질 세계에서는 여전히 몸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는 몸으로 감각하기 전에는 대상의 성질을 알 수 없으며, 앞서 살펴 보았듯 그것을 토대로 기억이나 상상을 떠올릴 수도 없는 것이다. 물질 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자아가 있다고 하면서도, 감각적으로는 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러한 상태를 ‘자아의 양면성’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러한 양면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나는 지금까지 별 회의 없이 지각의 주어를 각 생명 개체로 두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이 하는 생각이 '단선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며 생각으로 '들어오는' 감각이나 생각으로부터 '나가는' 행위 또한 단선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일한 나'의 개념은 근대 철학사에서 거의 반박된 적이 없는 것이며,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 관찰되는 수많은 종류의 생물들이 하나의 신경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따라서 우리는 샴 쌍둥이를 '두 사람'에 가깝게 보는 것이며 둘을 분리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지각의 담지자가 꼭 각 개체의 범주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가정은, 모든 귀납적 추론의 결과가 그렇듯이, 깨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단일한 나’에 대한 믿음의 그럴듯한 이유들을 찾아보자. 진화론의 입을 빌려 말해보면, 개체의 복잡도가 줄어들수록 각 개체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버섯과 잔디, 곰팡이 등은 도무지 '개체'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개체가 원시적인 신경체계라도 갖고 있다면 그것으로 세면 되겠지만, 그것조차 없는 경우는 '같은 DNA를 가진 뭉쳐있는 세포집단' 정도로 정의할 수 밖에 없다. 개체의 정의를 후자라고 하자. 그런데 그 개체는 생명이기 때문에 생식을 하고, 그 자손은 보통 부모와 DNA가 약간씩 달라진다. 이것이 그들을 서로 다른 개체로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만, 이러한 기준을 받아들이는 경우 가령 사람의 생식세포도 부모의 양쪽 모두와도 다른(정확히 말하면 반쪽이며 돌연변이도 가능한) DNA를 가지므로 그 또한 또다른 개체로 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기준을 계속 밀고 나가면 결국 개체는 DNA, 정확하게는 DNA의 정보로 환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기준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먼저 개미다. 개미 집단은 모두 한 배에서 나왔으므로 모두 같은 DNA를 갖고 있다. 그럼 각각의 개미는 개체인가 아닌가? 분명 신경체계는 각각의 개미가 따로 갖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쌍둥이다. 아니, 개미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인간의 일란성 쌍둥이가 DNA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신경계가 없는 생물의 경우는 단순 대사만 가능하므로 DNA를 기준으로 하고 신경계가 있는 생물은 신경의 수를 기준으로 해야 하는가?

왜 모든 생물은 한 신체 안에 신경계를 한 개씩만 갖고 있을까? 그것은 진화론에 따르면 신경계가 둘 이상 있는 돌연변이들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손 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행위할 신체는 하나인데 명령을 내리는 신경계가 둘이라면 당연히 비효율적일 것이다. 그러나 효율적이건 비효율적이건 간에, 그런 '붙은 개체들'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신경계 간의 관계는 마치 공생관계와도 같을 것이다.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생식이 그 두 신경계의 공통적인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 생물이 성공적으로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두 신경계 간에 안정적인 규칙이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한 의사소통 기능을 가진 신경계들이라면 마치 다른 개체와 소통하듯이 서로 소통할 수도 있고, 아니면 몇 번의 행위 충돌 끝에 균형점을 찾을 수도 있다. 어쨌든, 안정적인 규칙이 생긴 다음에는 이 '붙은 개체들'은 마치 하나의 개체처럼 행동한다. 그 행동에 모순이 없으므로, 두드러진 외모상의 차이가 없다면 다른 개체는 이 개체의 신경계가 두 개인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비슷한 예는 멀리 찾을 것 없이 인간의 기억상실증 혹은 다중인격 현상에서 볼 수 있다. 물리적으로는 하나의 신경계지만 그 신경계 안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것을 그 신경계의 다른 부분이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결국 공생하는 두 개의 신경계와 행동 상에서는 다를 게 없어진다. 좀 기준을 약화시킨다면, 우리가 혼자 고민하는 것이나 알지 못하는 사이에 꾸는 꿈 같은 것이 있다. 혼자 고민하는 동안에는 스스로와 대화를 한다고 하는데, 두 개 이상의 대치되는 주장이 서로 반박되는 과정은 두 개의 신경계가 공생하면서 서로의 안정점을 찾아가는 것과 비교되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꾸는 꿈은 일시적인 기억상실이다. 이상의 예를 보면 '하나의 신경계가 곧 하나의 개체'라는 기준 또한 확고하지만은 않게 된다. 여기에 더해, 도킨스는 DNA 이전의 정보전달자로 광물의 결정이 존재했을 수도 있으며, DNA의 이후에는 ‘밈’이라는 새로운 정보전달자가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8] 이 주장을 인정한다면, 광물 결정도 스스로를 조직하고 정보를 저장하므로 이것까지 지각의 담지자로 포함시켜야 하는가? 이것은 너무 극단적인 주장이겠지만, ‘인간의 본질로서의 분석성’ 개념이 부정된 이상 이 주장이 필연적으로 거짓인 것도 아니다. 또 아마도 가상 공간의 정보전달체계가 될 것인 밈은 또 어떠한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근대 철학사에서 가장 확고한 개념 중 하나인 '단일한 나' 또한 ‘세계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의 물음이 아닌 세계를 믿음체계로서 보려는 사고에서는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무너진다면, 자아가 지각의 담지자이자 그것의 일부라는 '자아의 양면성'은 필요 없는 고민이 되어버린다. 자아가 쪼개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림으로써, ‘연장성’이 없는 것으로 물질과 구분되던 ‘데카르트적 정신’의 개념 또한 무너지는 것이며 자아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2. 4. 믿음체계적 사고와 지속적 시간

 

  앞서 등장한 것이 ‘대상이 존재한다(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적 진술 자체를 어떤 선험적 가정(믿음)에 근거한 것으로, 즉 대상의 존재 여부 이전에 세계를 가정과 그에 기반한 이론 체계로 보려는 ‘믿음체계적 사고’이다. 이러한 사고 하에서는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불가능하며, 이는 그것을 지각하는 자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존재가 근거하는 가정이 무너지면 대상의 존재 여부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9] 예를 들어 가장 분석적이고 선험적인 지식이라는 수학의 좌표공간을 생각해보자. 좌표공간은 경험에 근거하지 않고도 충분히 전체를 상상하고 그 안에서 점들의 운동과 위치를 대수로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분석성은 오직 좌표공간의 모든 점이 원점 0으로부터의 거리로서 정의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0과 같은 단일한 기준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한 점이 여러 수로 나타나거나 한 수가 동시에 여러 점을 나타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즉 데카르트적 물질세계에 일관적으로 대응될 수 없다. 이 예는 가장 분석적이고 선험적인 사고라도 그것이 근거할 형이상학적 가정이 도입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아 또한 같은 가정에 근거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생명적 개체성과 상관없이 통합되거나 분리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극단적 상대주의라고도 할 수 있지만, 흔히 생각하는 상대주의와는 다른 의미이다. 믿음체계 간의 공유는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되므로, 반대로 한 믿음체계 하에서는 참인 것은 언제나 참이다. 두 믿음체계를 한 자아가 공유한다는 것은 ‘대상 A가 존재한다’와 ‘대상 A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두 진술이 동시에 성립하는 것과 같이 모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절대적 진리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논리적 사고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10]

어쨌든, 이러한 사고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그 전과는 다른 ‘시간’ 개념이 도입된다. 대상의 존재 여부와 자아를 결정하는 분석성 자체가 가정의 변화에 근거하며, 가정의 변화는 곧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 지속적이고 절대적인 시간 개념의 도입을 뜻한다. 이 지속적 시간이 과학적 시간과 다른 점은 과학적 시간이 외부 대상의 운동에 대해서 적용하고 기술할 수 있는 하나의 성질인데 반해 지속적 시간은 그것을 관찰하는 자아마저 하나의 선험적 가정이라고 봄으로써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근대 서양철학에서는 자아와 물질 세계를 분리시킴으로써 이러한 지속적 시간 개념 또한 자연히 등장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이나 불확정성 이론 같은 현대 물리학의 발견에서는 전 물질 세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었던 뉴턴-과학적 시간의 개념이 무너지고 관찰자가 대상과 완전히 분리 및 고정된 채 대상을 관찰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됨으로써 이러한 지속적 시간의 개념의 선험적 가정에 하나의 좋은 예가 되고 있다. 또한 지속적 시간의 개념은 불교의 윤회설이나 연기설과도 연결된다. 이것은 뒤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내가 바라보며 살고 있는 세계라는 것이 곧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기도 하나, 내 마음은 또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믿음에 근거한 사고 체계이므로 언어적 사유 이전에는 나와 대상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이다.[11] 이러한 사고에서 시간은 좌표공간에서의 운동이나 논리적 인과관계가 아닌, 전후가 모두 섞여있고 나와 대상이 모두 변하므로 따라서 내가 대상이 되고 대상이 내가 될 수 있는 순환적 시간이다. 이것은 곧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언어로써 아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논리적 사고 이전의 텅 빈 마음, ‘한마음(一心)’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다.[12] [13]

 

 

3. ‘한마음’의 수양 – 돈오와 점수

 

3. 1. 믿음체계(관점)을 갖는 이유 – 공포와 욕망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믿음체계(관점)을 갖고 세계를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공포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을 잡을 수 없게 되고 이는 자아가 늙고 병들고 죽고 무시당하는 등 변화에 휩쓸려 무상하게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공포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자아를 무상한 변화에서 찾으려는 시도 자체에서 오는 역설이다. 즉 불교의 ‘오온(五蘊)’이라 부르는 인간 존재의 요소는 무상하게 변하는 것이지 불변하는 자아가 아니다.[14] 이는 위에서 살폈듯이 자아 자체가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자아를 마치 좌표공간 상의 ‘0’처럼 고정시켜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오해인 것이다.

이러한 공포는 현실에서 다양한 욕망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자아에 확실성을 부여하고자 많은 것에 의지한다 – 돈, 명예, 주변인에 대한 ‘사랑’을 가장한 집착 등에서, 넓게 보면 세계를 과학적 틀로써 바라보려는 시도나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념 등. 이러한 것들이 제공하는 삶에 대한 확실성은 일시적이나마 우리를 변화하는 세계에 직면하는 고통을 잊도록 하고 안정을 찾게 한다. 우리는 변화하는 세계를 고통과 공포로서 받아들이지만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고 사랑과, 혹은 그것을 포함하는 이상적 이념으로써 스스로의 도피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언어로서 지어진 하나의 믿음체계일 뿐이므로 결코 세계를 바로 보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언어 이전의 본질, 한마음을 깨닫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이 ‘이심전심’을 말한 부처 뿐 아니라 다른 위대한 성인들도 저술을 통해서가 아닌 행위와 말로서 그들의 사상을 전하려 한 이유일 것이다. 마음을 떠난 텍스트는 마음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피하려는 개인들에게 좋은 핑계거리가 될 뿐인 박제인 것이다.

지눌은 이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미혹된 지가 너무도 오래되어, 자신의 마음이 바로 참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 그래서 진리를 구하려고 하면서도 여러 성인들만 멀리서 받들 뿐”[15]이라고 꾸짖는다. 물론 그에게 이 말은 교리만을 중시하는 교종의 수행 방식을 비판하는 말이겠지만, 널리 보면 자신이 믿고 있는 이념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념을 배척하고, 자신의 이념이 옳으므로 자연히 자신의 존재도 확실성을 갖게 된다는 모든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에 이를 적용하자면 정치적 무임승차를 꼽을 수 있다. 즉, 생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꺼리는 현대인들은, ‘모든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근대적 평등 이념의 뒤에 숨어서 정치적 행위는 몇 년에 한 번 수 백만 명 중 한 표를 던지는 것으로 끝내고 오직 자신의 쾌락과 생존 문제에만 집착하는, 파편화된 대중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타인에게 헌신하고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싸움으로써 용기와 자아를 드러내던 고대의 영웅 이야기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공포를 이념화된 언어에 의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들은, 불교나 믿음체계적 사고에서 보면, 진리가 아닌 허상 속에서 헤매는 것이며, 결코 고통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념에 스스로를 의탁한 개인들은 이념 전체를 위한 하나의 수단적 부속이 됨으로써 자아를 더욱 무상한 고통 속에 몰아넣는 것이며, 이를 탈피하기 위해 개인들은 무엇인가에 대한 집착과 중독 속에 빠져드는, 불교의 지옥과 같은 세계가 될 것이다.

 

3. 2. 마음을 비우다 – 진정한 믿음

 

따라서 지눌은 끊임없이 ‘진리를 다른 데서 찾지 말고 마음에서 찾으라’[16]고 말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마음을 어지럽히는 공포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온갖 사유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고요한 한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언어적 사유는, 앞서도 말했지만, 공포를 피하기 위해 현재를 벗어나 있지도 않은 것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변화하는 세계를 외면하고 고정된 무엇인가에 스스로를 매달리도록 만들지만, 이것은 항상 변화하는 세계의 일부거나 혹은 그 전부인 스스로의 삶을 저버리는 일이다. 즉 스스로의 삶을 충실하게 살려면 현재가 아닌 것에 대한 망상을 버리고 오로지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세계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세계를 직시하지 못한 사유의 결과물일 뿐이므로, 세계는 오직 변화하는 현재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유로써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잊음으로써 진리에 닿는 문제가 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대상과 자아가 나뉘므로, 대상을 자아로 포착하는 것이 아닌 대상을 잊음으로써 대상과 자아가 하나가 된 본래의 세계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17] 즉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그 대상을 주변의 세계와 구분함으로써, 즉 주변을 배경화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 구분을 통해 우리는 그 대상이 마치 고정된 실체이고 세계로부터 떨어진 것인 냥 사유하며 이를 사유하는 자신 또한 그러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이 구분을 지우면 지울수록 세계는 고정된 박제 상태에서 벗어나 계속 흘러가고 대상과 배경과 내가 하나가 되는, 즉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연기(緣起)적 세계의 본연의 상태가 된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간단히 말하면, 믿는 것이다. ‘자신이 곧 부처임’을 믿는 것[18]이기도 하고, 자신이 외부의 이념이나 지위로 결정되지 않음을, 생존과 변화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있음을 믿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믿음은, 앞서 말한 믿음체계적 사고의 형이상학적 가정으로서의 믿음과는 다른, 진정한 믿음이다. 전혀 아무데서도 근거를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A라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고 하자. 형이상학적인 가정으로서의 믿음이라면, 이를 끊임없이 검증하고자 할 것이다. 즉 내일이고, 모레고, 몇 년, 몇 십 년 동안 반복적으로 관찰해도 A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폐기되고 다른 믿음이 그 확실성의 자리에 들어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생존을 위해 매일 채택하는 방식이자 과학의 탐구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거가 없는 믿음이라면 관찰은 필요가 없다. 몇 십 년 동안 일어나지 않은 것이 내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지 세계에 확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우리의 상상일 뿐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믿음으로써 대상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 세계와 자아에 확실성을 부여하려는 우리의 욕망을 꿰뚫을 수 있다.[19]

믿음은 또한 언어를 뛰어넘는 공유를 가능케 한다. 언어는 위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공포를 면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달마가 ‘마음이 불안하다’고 하는 신광에게 ‘너의 마음을 가져오라’고 했듯이[20], 타인의 감정, 특히 고통을 전해주지 못한다. 타인이 ‘아프다’고 하는 말을 듣고 같은 아픔을 다시 감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내가 만약 아프다고 해도 그것이 타인과 같은 것인 것 보장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아픔과 ‘아프다’는 말이 각각 산 감각과 죽은 언어이기 때문이고,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이다. 즉 내가 고통을 느껴야 타인의 고통을 믿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믿어야 그것이 나의 고통이 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고통과 타인의 ‘아프다’는 말일 뿐, 같은 고통이 될 수 없다.

 

3. 3. 漸修로 나아감

 

위의 논의로 우리는 ‘돈오’에 다가간 것인가? 지눌은 ‘번뇌성이 없는 신령스러운 앎의 성품은 본래부터 자신에게 이미 넉넉히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것이 ‘돈오’라 한다.[21] 확실히 우리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불성이 스스로에게 있으며, 단지 그것을 믿을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깨닫지 못한 것이 된다. ‘텅 비어 있는 본체’, 즉 한마음은 ‘형상, 모양이 없어 말로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22] 즉 우리는 언어 이전에 진리가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려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것이 지눌이 돈오에서 머무르지 않고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 진리에 스스로 닿게 되는 것, ‘점수’를 강조한 이유이다. 지눌에 따르면 ‘(돈오를 하여도) 시작 없는 과거부터 익혀온 습기[23]를 단박에 제거할 수 없으므로’,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어른처럼 모든 감각기관을 갖고 있지만 사람 구실을 하려면 세월이 제법 지나야 하는 것’처럼 돈오 뒤에는 점수가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24] 만약 돈오 뒤에 점수가 따르지 않는다면 ‘다시 전처럼 흘러다니며 방랑하게 되니, 윤회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25] 이 말은 교리로써 진리를 터득했다고 하며 수행을 게을리하는 교종의 승려들을 비판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위에서 말한 진정한 믿음을 설명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불성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머리로만이 아닌, 매일의 실천으로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삶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있기에, 매 순간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고 그것이 세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緣으로 이어져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곧 부처의 길이 된다. 이것은 고통의 길도 아니고, 주변 세계에 의해 자아가 예속된 것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을 깨달음으로써 ‘자유롭고, 생각마다 일체의 경계를 반영하면서도 마음 마음은 일체 번뇌를 영원히 끊어버린’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지눌은 말한다.[26]

 

l  참고문헌

윤홍식, 『윤홍식의 수심결 강의』, 봉황동래, 2007

서정형, 『정혜결사문, 지눌이 밝힌 선정과 지혜의 길』, 풀빛, 2007

심재룡, 『지눌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리처드 도킨스, 『눈먼 시계공』, 이용철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

『신약성서』, 대한성서공회, 1998

Hilary Putnam (1973), “Meaning and Reference”

[1] 이 글의 『수심결』 인용 부분은 모두 윤홍식, 『윤홍식의 수심결 강의』, 봉황동래, 2007 에서 재인용한 것으로, 각주의 페이지는 윤홍식 저에 따른 것이다.

[2] 마찬가지로 『정혜결사문』 인용 부분은 모두 서정형, 『정혜결사문, 지눌이 밝힌 선정과 지혜의 길』, 풀빛, 2007 에서 재인용한 것으로, 각주의 페이지는 서정형 저에 따른 것이다. 재인용이 아닌 부분은 ‘서정형 저’임을 각주에 명시하겠다.

[3] 이러한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은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서울대학교의 표어에도 드러난다.

[4] 『수심결』 p 115; “…口談眞理 心生退屈…”

[5] 이하의 ‘H2O’와 ‘XYZ’에 관한 사례는 Hilary Putnam (1973), “Meaning and Reference”이라는 분석철학 논문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것이지만, 그 논문에서는 ‘쌍둥이 지구’라는 가능세계에서 XYZ가 발생하였다고 가정, 그를 통해 논리적 필연성과 의미의 내재주의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6] 『수심결』 p 71;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우리는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을 당연하게 여기고 이것을 통해 바깥(대상)에서 본질을 찾으려고 하지만, 가장 먼저 질문을 제기해야 할 것은 우리가 당연히 여기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다.

[7] 서정형 저 『정혜결사문…』 p 24; 다만 십팔계의 ‘지각 기관의 대상’에는 생각도 들어가 있으므로,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감각 자체라기보다 의식된 감각, 즉 기억된 감각에 가까운 개념이다.

[8] 리처드 도킨스. 『눈먼 시계공』. 이용철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 p 261

[9] 『수심결』, p 197; “…諸法如夢 亦如幻化…”

[10] 『수심결』 p 188; “…旣是自心 何更求會 若欲求會 便會不得 但知不會 是卽見性”

[11] 『수심결』 p 225; “…曰汝返聞汝聞性 還有許多聲麽 曰到這裏 一切聲一切分別 俱不何得…”

[12] 『수심결』 p 76; “答在汝身中 汝自不見 … 能見聞覺知者 必是汝佛性”

[13] 『정혜결사문』 p 42; “한마음을 몰라서 끝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이가 보통 사람인 중생이고, 한마음을 깨달아서 한없는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는 이가 깨달은 사람, 즉 부처입니다.”

[14] 서정형 저 『정혜결사문…』 p 17

[15] 『수심결』 p 54

[16] 『수심결』 p 87; “…則佛性 現在汝身 何假外求…”

[17] 『수심결』 p 102; “僧云如何保任 師云一穢在眼 空花亂墜…”

[18] 『수심결』 p 99; “…如何是佛 宗云我今向汝道 恐汝不信 僧云和尙誡言 焉敢不信 師云卽汝是”

[19] <요한복음>, 『신약성서』 20장 29절;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이는 행복하다”. 혹은 <마태복음>,『신약성서』 17장 20절;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저리로 옮겨가라!’고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성서에는 이 뿐만 아니라 ‘나’라는 단어를 ‘예수’가 아닌 ‘자아’ 혹은 ‘불성’으로 대체하면 상당히 불교적 교리와 일치하는 구절이 많다.

[20] 서정형 저, 『정혜결사문…』 p 37

[21] 『수심결』 p 155

[22] 『수심결』 p 225

[23] 과거에 지은 업의 종자

[24] 『수심결』 p 171

[25] 『수심결』 p 270

[26] 『수심결』 p 403
Posted by SP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