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짓기/감상/짧은글2010. 10. 13. 20:19

1. 이 글의 목적

이 글은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사상, 그 중에서도 형이상학적 성과인 ‘허상(시뮬라크르, simulacre)’[각주:1]과 ‘계열’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정리 및 이해하고 그 타당성을 검토한 후 사회 및 윤리적 문제들에 적용하여 탐구한다.

2. 들뢰즈의 형이상학

‘존재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 철학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19세기 이전까지의 서양철학의 흐름에 집중할 때 크게 두 갈래의 흐름을 볼 수 있다. 하나는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으로부터 시작하는 형상의 철학이고, 또 하나는 고대의 자연철학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는 물질의 철학이다.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대상의 성질이 아닌, 감각할 수 없는 대상의 본질이 존재하고, 그 본질에 가까운 정도에 따라 대상의 존재 정도가 결정된다는 것이 전자이고, 반대로 그러한 ‘형상’ 개념을 부정하고 물질을 존재의 본질이라 보았던 것이 후자이다.

그러나 이 구분은 두 극단의 예로서, 이후 서양철학에서는 그 사이의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특히 고대 그리스 이후 이어진 초월적 실체를 향한 철학적 탐구에 대해, 흄이 ‘법칙과 인과율 등은 경험과 습관으로부터 만들어진 신념’이라며 이전까지 당연시되었던 이성적 사유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형이상학의 토대 자체가 논쟁의 중심이 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실증주의의 등장 이후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 같던 형이상학은 영원불변의 초월적 본질을 추구하던 그 이전까지의 공간적 사유에 ‘시간’과 ‘생성’의 개념이 개입하면서 새로운 문제들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사유에 ‘시간’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철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순간의 변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때 나타나는 ‘허상'이라 불리는 개념은 이러한 현대의 형이상학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되었지만, 지속적인 본질을 탐구하던 전통 철학에서는 순간에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은 영원한 것에 비해 무가치한 것들, 실재적이지 못한 것들이었다.[각주:2] 이를 비판하면서 현대 형이상학의 논쟁들이 등장하는 것인데, 들뢰즈는 그 중에서도 ’허상‘의 존재 양식에 집중하여 그것이 어떻게 “계열화”되고, “잠재적”으로 존재하며, “분화”되어 나타나는지를 탐구한 철학자였다(그래서 그는 “구조주의는 장소가 자신을 채우는 것을 지배하게 되는 새로운 선험철학과 분리가 불가능하다”[각주:3]고 한다). 또 그의 사상은 ’빈 칸‘의 개념을 통해 계열들이 교차하고 구조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밝히려 했다는 점[각주:4]에서, 모든 사건에 잠재된 닫힌 구조를 가정하는 기존의 구조주의와도 다르다.

이 글의 목적이 이러한 담론사적 맥락을 되짚는 것이 아니므로 ’허상‘과 그것에 대해 말하는 들뢰즈의 철학사적 위치에 대해서는 일단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그의 사상을 여러모로 검토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메우도록 하겠다.

3. 들뢰즈의 사상 검토

3. 1. 실재론과 관념론 비판

들뢰즈의 사상이 나온 배경을 검토하려면, 먼저 근대의 초창기에 촉발된 실재론과 관념론의 논쟁, 즉 ‘세계는 실재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살펴봐야 한다. 왜 지속적인 실체를 찾지 않고 순간의 허상(simulacre)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는가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논쟁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사유’ 개념 자체가 왜 문제가 되는지, 들뢰즈의 사유에서의 ‘계열’에 돌아볼 점은 없는지 생각해 보기 위한 작업이다.

우선 감각되는 것이든 되지 않는 것이든 우리의 관념을 만들어 내는 정신활동의 총체, 이 글에서 ‘사유’이라 지칭되는 것 전반을 생각해보자. ‘아는 것’은 그것을 ‘아는 주체’, 즉 사유의 주체인 자아를 가정한다. 반면 전통 철학적 의미에서 ‘있는 것’은 사유의 주체 없이도 그 사물이 있음만을 의미한다. 관념론과 실재론의 기나긴 인식론적 논쟁은 여기에 기초하며, 이 글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철학적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해 각각 극단적인 관념론과 실재론을 가정한다.

먼저 실재론의 주장을 보자. 이 주장의 핵심은 ‘경험하지 않아도 존재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의 존재를 아는 것은 경험이 아닌 분석적 사유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실재론자들은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을 비판하는 핵심 작업은 ‘분석적 사유’의 개념을 분석해 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흄의 논의가 대표적인데, 여기서는 이 밖에 분석적 사유의 한 대표적인 예로서 수학적 사유를 분석해 보겠다.

이를 비판하는 첫 번째 방법은, 수학이 감각적 경험, 특히 시각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수학은 대표적인 공간적 사유이고, 우리는 수학의 도구를 통해서 시간을 그래프의 한 축으로 대치, 혹은 공간화하며 이것이 근대 과학의 전형적인 시간틀이다. 즉 가장 간단한 연산으로 ‘1+2=3’을 생각해도 우리가 그 결과를 참이라고 확인할 수 있는 것, 더 나아가 그 연산 체계를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동시에 세 개의 구별된 개체를 확인할 시각이나, 시간상 연달아 존재했던 개체들을 확인하고 기억할 시각 경험의 기억, 받아들인 감각 경험들을 추상적으로 개체로서 구분할 수 있는 사유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마지막 전제로서의 사유가 어떻게 존재하는가가 특히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데, 이는 이 글에서 계열을 특히 사유 상에서의 계열로서 다루는 근거가 된다. 이 얘기는 뒤에 다루도록 하고, 첫 번째 방법에서 주장을 약화하여 수학적 지식이 선험적 지식이라고 가정하고 분석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험적 지식이 경험적으로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단절시키는 것이다. 편의상 ‘7은 소수’라는 지식이 선험적 지식이지만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고 하자.[각주:5] 이 때 첫째 방법은, 계산기를 두드림으로써 바로 ‘7은 소수’를 아는 경우, 즉 계산기의 계산 과정에 대한 지식이 없이 두드리는 경험만으로 아는 경우이다. 이것은 마치 ‘신이 만든 계산기’를 통해 아는 지식과 같다고 상상할 수 있다 – 과정을 모른 채 ‘7’을 누르는 것만으로 ‘소수’라는 결과가 항상 나온다면, 그 지식은 분명 경험적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는 분명히 계산기를 어떤 규칙에 따르도록 만들었는지 알고 있으며, 만약 ‘신이 만든 계산기’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7은 소수’라는 계산 결과를 증명하는 과정은 물리 현상을 보고 물리적 법칙을 추측하는 것과 같이 선험적 지식이 아닌 경험적 지식임을 인정해야 한다. 즉 결론 부분에서 확실해지겠지만, 선험적 지식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들은 사실, 같은 선험성에 근거하면서도 유용성을 위해 경험을 덧붙인 것이다.

둘째는 “물리적 법칙이나 계산기의 제작 과정 등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7은 소수’란 결과를 믿는 것이다. 여기서 과거의 계산기 사용 경험들에 대한 믿음은 첫째의 경우와 같은 패턴이므로 제외시킨다. 이제 계산기의 제작 과정에 대한 믿음을 보자 – 이것은 주어진 연산을 물리적 법칙에 따라 틀림없이 해낼 것이라는 믿음이고, 주어진 연산이란 ‘수학 체계’라는 선험적 지식에 근거한다. 간단한 예로, ‘1+1=2’를 선험적으로 아는 것과 돌멩이로 계산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돌멩이 하나(A)에 돌멩이 하나(B)를 더해 돌멩이 두 개가 되었다는 것이 ‘1+1=2’와 같은 지식이 되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첫째, 돌멩이 A와 돌멩이 B를 모두 같은 ‘1’로 치환해야 한다. 둘째, 돌멩이 A와 돌멩이 B를 함께 묶어 ‘2’로 치환해야 한다. 이러한 치환은 구체적 사물을 선험적 체계인 수 체계로 나타낸다는 것이며, 곧 구체적 경험을 통한 지식은 선험적 지식으로 확인되어야 같은 지식이 된다는 것이다 – ‘1’과 ‘2’로 치환된 후에야 돌멩이는 없어지고 ‘1+1=2’라는 지식이 될 수 있다. 확인 전까지는, ‘A와 B가 모여 ‘A와 B’(혹은 X)가 되었다’는 ‘1+1=2’와 같은 지식일 수 없다. 만약 수 체계가 경험에 의한 추상화로 인식될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곧 ‘수 체계는 선험적’이라는 우리의 가정을 위협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여 선험성을 인식론의 개념이라 하면, 어떤 지식을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과 인식할 수 없는 사람을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증명을 통해 7은 소수임을 알게 되고, 후자는 계산기에 두드림으로써 ‘7은 소수’를 알 수 있다. 그러나 ‘7은 소수’의 의미를 묻는다면 전자는 증명의 내용을 대답하겠지만 후자는, 수 체계와 증명의 내용을 모르는 이상, ‘계산기가 알려주었으므로’라는 대답 밖에 못한다. 순수한 경험만으로 얻은 ‘7은 소수’는 기호일 뿐, 전자의 수학적 지식으로서의 ‘7은 소수’와는 다른 지식을 의미한다. 경험적 지식인 ‘7은 소수’가 수학적 지식이 되려면, 사후적으로 선험적 지식의 확인을 받아야, 즉 선험적 지식이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선험적 지식을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는 진술은 모순, 즉 선험적 지식에 의한 사후 확인 과정을 무시한 것이거나, 그것이 선험적 지식이 아님을 함축한다. 따라서 위의 가정 하에서 수학적 지식의 본래 의미는 선험적으로만 알 수 있으므로, 실체에 대한 선험적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경험적 지식과 환원될 수는 없는 것, 즉 선험적 지식을 말할 때에 경험적 근거를 드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즉 그러한 선험적 지식을 부정하는 사람과는 같은 진술에 대해서도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실재론은 선험성 안에 갇히게 되는데, 더 나아가면 ‘수학적으로 구축된 들뢰즈의 ‘계열’ 개념도 경험적으로는 그 구조를 알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즉 이에 따르면 들뢰즈가 말하는 ’계열‘을 경험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결코 그 ’계열‘의 존재를 검증하는 것과 의미가 같을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가 ’잠재성‘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건들은 그것이 분화(differenciation)되기 전까지는 들뢰즈의 ’계열‘을 위한 어휘에 지나지 않으며, 분화 이후에도 그것이 계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라는 문제는 경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수학과 계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루도록 하겠다.

이제 관념론을 살펴보자. 극단적인 관념론은 ‘모든 존재는 관념이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를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은 ‘관념의 주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과학적 일반성, 영원불멸의 실체 등이 관념에 불과하다면, 그 관념을 만들어내고, 더 나아가 그것이 관념임을 알며, 그 관념조차 비판하려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진화론이 끼친 영향은 지대할 것이다. 당연시되어 온 ‘자아’ 개념을 ‘유전자적 욕망의 담지자’ 정도로 해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후 정신분석학과 ‘생성’을 중시한 베르그송 등의 철학자에 의해 절대적 이성의 ‘자아’ 대신 욕망으로 생성되는 ‘생명’이 대두되었고, 들뢰즈의 ‘수동적 종합’과 ‘애벌레 주체(sujets larvaires)'로서 이를 표현한다. 즉 칸트의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종합에 비해 의식 이전의 관조를 통해 애벌레 주체들이 순간을 수축하여 현재를 종합한다는 것이다. 이는 순간의 ’허상‘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그의 철학 상 ’지속하는 자기 동일성‘의 개념은 깨뜨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을 사유로써 종합하는 주체‘가 아닌, ’허상이 계열화하여 구축하는 현재‘의 이미지는 관념론이 가정하던 토대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당연시해왔던 형이상학을 검토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본래부터 ’무엇이 존재하는가‘가 아닌 ’왜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가‘, ’무엇이 그러한 질문을 던지도록 하는가‘라는 질문까지 파고들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기 동일적 ’자아‘를 만들어가는 사유의 구조를 분석해야 한다.

3. 2. 사유의 구조[각주:6]

사유의 구조를 탐색해야 하는 이유는 위에서도 밝혔지만, 허상이 중요한 이유가 그것의 의미에 있기 때문이다. 즉, 허상 자체는 별다른 물리적 변화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사유에 끼치는 특정한 영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허상, 들뢰즈가 ‘특이점’[각주:7]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허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의미, 또는 그것이 구성하는 사유에 집중해야 한다.

3. 2. 1. 착시

우리에게 우리가 사유하는 방식에 대해 힌트를 주는 것은 먼저 착시 현상이다. 가령 게슈탈트 심리학의 실험 중 오리로도 토끼로도 볼 수 있는 유명한 그림의 경우, ‘오리이다’라고 말하는 피실험자는 그림에서 오리의 형상을 떠올린 것이라고 할 때, ‘오리의 입은 토끼의 귀일 수 있다’라는 진술을 들었을 때 그가 그 그림에서 토끼를 떠올린다면 그것은 그 진술에서 그 그림 자체를 인식한 것이 아니라 ‘오리-입’ 각각의 어휘와 대응되는 현상과 그들의 관계가 ‘토끼-귀’로 대응되는 현상과 그들의 관계로 대치됨으로써 가능해졌다고 설명된다. 그가 언어를 사용할 때 어휘에 대응되는 현상이 아니라 언어 자체 혹은 대상 자체를 다른 대상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인식하는 것이라면 오리로 보이던 것이 순식간에 토끼로 보이거나 둘 중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은, 언어이든 그림이든 그 무엇도 실제로는 바뀐 일이 없기에, 설명되지 않는다. 이 때 더 새로이 알 수 있는 것은, 어휘에 현상이 대응할 뿐만 아니라 각 어휘의 인식 상의 의미는 ‘오리-입’처럼 다른 어휘와 관계된 사례가 인식 상에 존재할 때 더 잘 정의될 수 있으며(사실 위의 예에서 ‘오리’와 ‘입’에 대해 다른 현상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보다는 특징적인 ‘오리 입’에 대한 현상을 한 번에 떠올린다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더욱이 그 어휘에 대응하는 현상이 바뀔 때에는 그와 관련된 다른 어휘들에 대응하는 현상까지도 상대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입’이 ‘귀’로 바뀌면서 ‘오리’가 ‘토끼’로 바뀌는 것처럼). 이렇게 우리는 인식 상의 어휘들이 그에 대응하는 현상의 변화에 의해 의미가 바뀌고 그에 따라 진술로써 연결된 다른 어휘들의 의미가 바뀌는 것을 통해 인식 상에 어휘 체계가 존재하며 이를 구성하는 유동적인 인식의 구조가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착시 현상은 이처럼 우리의 사유가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 대상의 몇몇 특이점들에 의미를 대응시키는 중에 여러 의미가 중첩되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여러 의미가 중첩되면서 계열을 엮고 구조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들뢰즈의 ‘빈 칸’ 개념이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는 예라 하겠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편의상 ‘자아가 대상을 파악하기 위한 종합’이라고 말하지만 들뢰즈의 이론이나 이 글의 목적 상 이는 거꾸로 ‘순간 순간의 특이점들의 의미가 계열화되어 의식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자아’의 관념이 어떻게 구성되고 역동적으로 변화하는지를 살펴본다면 이러한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왜 이런 허상들이 의식을 구성하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3. 2. 2. 언어와 칸토르 집합

위의 착시 현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사유 구조가 특이점들과 그것들의 관계로 엮여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런데 ‘특이점’이라는 말은 그것과 ‘배경’의 구분을 내포한다. 즉 대상을 기억할 때 배경과 분리된 대상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에서도 몇몇 특이점들과 대상 안의 배경으로도 구분되는 것이다. 이는 데자뷰 현상이 어떤 상황이나 대상의 몇 가지 특징이 겹침으로써 그 대상 전체나 다른 주위의 대상들도 이전의 다른 대상들과 겹쳐 보이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해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특이점과 배경이 불연속적으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허상에 대해 사유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시간적 간극이 발생하기 때문에 ‘순간’은 순간을 뜻하지 못한다. 우리가 책상을 본다면, 그 책상의 특이점들“만”을, 그것도 “동시에”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추상적 개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초월적 이성’의 개념을 포기한 시점에서 이는 필연적이었다. 특이점들은 그것들을 구분시켜주는 배경과 항상 함께 기억되며, 그 때문에 특이점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심지어 수학적 사유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점만 있는 수학이 가능한가? 어쨌든 특이점은 정확한 ‘점’의 개념이 아니라 순간을 사유하는 ‘무한소’에 가까운 개념이 되었는데, 여기서 들뢰즈의 ‘미분으로서의 계열’이 등장하거니와, ‘특이점’이 말하자면 마치 냇가에서 물을 떠내려는 시도처럼 ‘흐르는 시간을 사유 상에서 고정시키려는 노력’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시간과 특이점, 사유의 관계는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좀 더 깊이 알아볼 수 있다. 우리의 사유를 이미지보다는 어느 정도 고정된 틀로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즉, 언어생활을 시간이 고정되는 정도와 그 구조의 변화 정도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유가 어떤 방식으로 특이점을 기억하는지 추측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언어 구조가 완벽하게 닫혀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일상 언어를 매일 사용하지만, 발화자의 발화 의도를 청자가 완벽히 이해하지 못함을 느끼고 답답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도록 한다. ‘일상 언어가 완벽하게 논리적 구조로 사용되는 것은 가능한가’.

완벽한 논리적 구조를 가진 언어의 가장 근접한 예로서 수학을 생각해보자. 수학에서는 주어진 어떠한 질문에 대해서도 엄연히 정답이 존재하며 이 답은 그것이 논리적 절차에 의해 구해진 이상 시간이 흐른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 때 각각의 특이점, 어휘들은 누구에게나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언어 구조에서 시간은 멈춰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들뢰즈는 이를 바탕으로 계열을 탐구하기 위해 그 변치 않는 척도로서 수학적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일상 언어의 수준에서 이러한 “완벽한 고정”은 불가능하다. 수학과는 달리 일상 언어는 현실의 무엇인가를 지칭하기 위해 존재하고, 현실의 무엇인가는 변화하고 그 변화는 각자에게 다르게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 언어가 객관적이기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일상 언어는 이렇게 객관적일 수 없음에도 끊임없이 객관적으로 되려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뒤에서 보겠지만, 일상 언어가 사유의 전쟁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일상 언어에서 특이점들은 완벽하게 고정되어 변화와 단절될 수 없으며, 수학에 비해 어느 정도 느슨하게 연속적이고, 각자의 사유 구조 혹은 계열들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다르다. 수학과는 반대의 또 하나의 극단으로는 문학적 언어, 더 나아가면 음악을 꼽을 수 있다. 문학은 기존의 어휘에 굳어진 의미 대신 새로운 의미 혹은 중첩된 의미를 새로운 배경을 제시함으로써 등장시키며 이것이 음악에 가까워질 수록 들뢰즈적 의미의 ‘빈 칸’이 되어 기존의 사유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대신에 어휘의 의미는 통용되는 의미에서 멀어지고 따라서 객관성 또한 포기하게 된다, 즉 역동성 안에 시간이 더 많이 포함되며 특이점은 더욱 느슨해진다. 이러한 경향은 실제로 음악의 한 대목에 대해 생각할 때, 일상 언어에서 특정 어휘에 대해 생각할 때보다 단절점이 애매한 것으로 드러난다. 정리하면 수학은 박제된 물리 공간에 대한 언어, 순수한 관계에 대한 언어이고, 음악은 이 공간적 언어인 수학을 시간에 대입하여(‘리듬’의 개념에 가깝다) 지속을 인간의 사유 속으로 재구성하려던 시도이며, 문학은 사유와 지속의 넘어설 수 없는 괴리를 허구와 중첩된 의미로써 표현하려는 언어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언어들은, 수학마저도 사유의 구조 상의 시간에 대한 미분식에 불과하므로 지속하는 세계 안에 있으면서도 시간 자체를 파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수학은 철저한 공간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언어, 그리고 나아가 사유가 시간을 고정시키는 위의 방식은 수학의 칸토르 집합을 연상케 한다(여기서 ‘칸토르 집합’은 ‘실수공간 R에서의 일정한 구간에서 각 구간을 3등분하여 가운데 구간을 반복적으로 제외시켜 만든 집합’으로 정의한다). 물리적 공간과 지속하는 세계의 구분을 실수공간 R에서의 칸토르 집합 P를 빌어 생각해보자. P는 완전집합이다.[각주:8] 따라서 P의 무한한 조각들은 각각 고립된 점이 아니라 엄연한 구간들이다. 즉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는 것 같지만 그 사이에는 엄연한 공백이 있고, 또 엄연한 공백이 사이에 있어도 고립된 점처럼 보이는 각 부분들은 엄연히 그 안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단절이되 단절이 아닌 것, 그리고 전체와 비슷하면서도 무한한 구멍이 뚫려 전체를 포함하지 못하는 것. 칸토르 집합은 사유가 시간을 무한소로서 고정시키는 방식에 대한 수학적 비유이자 그 자체로 한 예이다(수학 자체가 시간에서 자유롭지 못한가의 논쟁은 제쳐두고라도, 이를 사유 구조에 대한 비유로 생각한다는 점이 시간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즉, 사유는 언어로서 세계에서 대상을 건져올려 다시 세계를 구성하는데, 언어는 문법 안에서 분절적이고 고정되므로, 이것은 칸토르 집합 P에서 R을 상상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분명 세계에 대한 근사값 같지만, 지속하는 R을 따르는 현실의 생명과는, 마치 칸토르 집합이 무한한 공백을 그 안에 포함한 것처럼, 건널 수 없는 괴리가 있다. 공간의 차원에서 아무리 언어를 무한히 분절하여 세계에 대한 근사값을 구하려 한다 해도 지속하는 세계에 닿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유 속의 ‘특이점'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사실 '선'의 무한소, 극한값이고, 반대로 '선'이라 보는 것은 고립된 점의 무한한 집합이 아닌 작은 '선'의 집합, 즉 칸토르 집합을 보는 것이다 - 우리는 점과 선을 생각할 때 각각 다른 차원의 관점이 되어 새로운 사고를 하지 않는다. 이것은 위상학에서

d(p,p')<ε ↔ p=p'[각주:9]

로 정의하는 것과 같다. 이 두 점을 같다고 보는 사유에 포함된 괴리가, 지속하는 '선'의 세계에 살면서 고정된 '점'의 사고를 하는 인간의 원초적 괴리다. 많은 신화와 종교적 경전의 창조 설화는 혼돈(칸토르 집합은 무한한 특이점들, 즉 각 구간의 끝점들을 만들어 내기에 카오스 이론의 토대가 된다), 혹은 질서와 사유 이전의 상태에서 사물들을 구분하고 그것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최초의 명명식(대표적으로는 구약의 에덴 동산) 이후 언어와 사유의 시대, 인간의 역사가 열렸음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창조 이후의 인간은 최초의 명명식 이전의 무의 상태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어떤 이야기에서는 그리워하며 그곳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인간의 원죄라고 한다. 비단 성서 뿐 아니라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노장사상도 지향점은 쫓겨나기 이전, 더럽혀지기 이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 원초적 괴리는 문명의 시작이자 죄의 시작일 것이다. 어쨌든 이 괴리는 사유의 계열이 끊임없이 닫히고 고정된 틀을 향해 가면서도 계속 실패하고 빈 칸을 남겨놓아 역동적으로 변화할 수 밖에 없음을 뜻한다.

3. 2. 3. 꿈, 사유의 너머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사유 구조를 탐색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인 꿈에 집중해 보자. 만약 의식적인 종합이라고는 말하기 힘든 꿈도 위에서 말한 사유 구조로써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의식 상의 ‘자아’ 개념을 넘어 들뢰즈가 말한 ‘의식 이전의 관조’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꿈은 인과의 해체이자, 인과의 결과물인 '자아'의 해체이다. 꿈의 이미지들은 낮의 기억보다 모호하고, 쉽게 다른 것으로 바뀐다. 낮의 논리적 인과에 의해 규정되던 나와 세계 각 사물들의 정체성, 그러니까 각각의 원소가 모여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인과적으로 규정되던 낮 세계의 정체성은 꿈 속에서 나를 포함한 각 원소의 정의관계가 흐트러지면서 뒤섞여 버린다. 한 꿈에서는 도저히 낮의 기억에서라면 같이 등장할 수 없는, 다른 시간과 다른 범주의 이미지들이 버젓이 함께 등장한다. 즉 시간적으로, 또 인과적으로 정렬된 낮의 기억에 비해 꿈은 무질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낮의 정렬된 기억이 고도로 정제된 결과물임을 암시한다. 즉 우리는 감각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선후와 인과관계를 연결지으면서 대상의 정의에 들어가지 않는 배경은 잊어버린다는 것이다(데자뷰 현상을 예로 들면, 우리는 코 밑에 점이 있던 다른 두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이런 정제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세계를 재구성하는 계열의 미분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꿈에서 무엇인지 알기 힘든 이미지들이 이유를 알기 힘든 순서로 등장하는 것을 볼 때, 특이점들은 그에 관련된 어휘나 뚜렷한 이미지, 그리고 관련된 다른 특이점들과의 차이에 대한 정렬된 기억을 갖고 다니지만 배경은 오직 특이점과 관련되어서만 느슨하게 기억된다는 점에서, 정제 과정에서 탈락한 배경들이 꿈에 나타나 기존의 특이점의 정렬된 계열을 흩트린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잠자는 동안은 세계를 사유 상에서 재구성할 필요가 없고, 감각 경험을 재정렬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정신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까지는 나아가지 않겠다. 다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꿈이, 또는 기억되지 않은 감각들, '무의식'이라 흔히 부르는 것이 신화적 혼돈과 인간의 문명세계 사이에, 언어와 감각 경험 사이에 놓이는 중간지대라는 것이다. 언어와 감각 둘 중 어느 것이 시간에 더 가까운지는 시간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우리의 사유 활동은 흘러가는 모든 감각 경험을 기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말하자면 인간은 낮의 기계를 지향하는 밤의 생명이며, 모든 감각 경험의 언어화는 기계의 이상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전술한 착시 현상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는 한 대상을 기억할 때 따로 떼어내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과의 연관된 의미로서 기억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경험과 연관성이 높을수록 더 잘 기억한다. 꿈도 마찬가지로, 이야기 구조가 비교적 명확한 꿈일수록 오래 기억에 남고, 전혀 연관이 없는 장면의 전환은 금방 잊어버려 기억해내지 못한다.[각주:10] 꿈에 등장하는 대상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어떤 대상은 실제로 나의 소유가 아님에도 나의 소유물로 등장하고, 어떤 대상은 실제 나와의 관계와 다른 관계로서 등장한다. 여러 대상의 특징을 조금씩 갖고 있어서 정확히 어떤 대상인지 인식하는 것이 어려운 대상도 등장한다. 즉 꿈에서는 현실에서 잘 정돈되어 있던 기억 체계가 뒤섞여 전혀 다르게 연관된 인상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물론 새로 감각하는 정보가 없기에 기존의 기억을 재조합하는 과정이며, 이것이 어떤 기능을 갖는가는 잠을 자지 못할 때의 증상을 관찰하는 수 밖에는 없다. 우리는 잠을 자지 못할 때 무력감을 느끼고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느끼며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어려워한다. 그리고 더 심각한 수면 부족의 경우에는 환각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고도 한다. 이것은 실제 대상에 대한 기억들 간의 연관성이 무너지고 마치 꿈에서처럼 뒤죽박죽이 되고 잘못된 꼬리표가 붙는 것, 즉 깨어있을 때의 정교해 보이던 기억 체계가 흔들리는 것 같이 보인다. 따라서 낮의 정돈된 기억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잠을 자야 한다는 추측이 가능한데, 곧 일부러 기억체계를 뒤섞어 떠올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 낮의 정돈된 기억을 버리고 이런 행위를 할까.

꿈의 기억과 현실의 기억이 다른 점은 전자가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불가능함이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몸인데,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우리가 꾸었던 꿈이 우리의 몸으로는 이룰 수 없는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깬 후에 보는 장면과 꿈 속의 장면이 전혀 다름을 인식하고 그것이 꿈임을 안다. 그 전까지는 분명 꿈이 현실이라고 믿었다가 눈을 뜬 순간에 그것이 부정되는 것은, 우리가 꿈 속에 있을 때 떠올리는 기억들이 현실의 것이 아님을 알리는 어떤 장치가 꺼져 있음을 알려 준다. 인간의 기능 중 렘 수면에서 꺼져있는 것은 바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기능이다. 즉 현실의 외부 대상과 인식을 연결하는 이 기능을 꺼버림으로써 사유는 고립되고 그 속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기억들을 짜맞추어 새로운 세계를 즉흥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능한 가설은 당장 둘인데, 첫째는 우리의 사유 구조는 언제나 갖고 있는 기억을 무작위적으로 조작하여 새로운 인식 세계를 만들려는, 혹은 기존의 정돈된 기억 체계를 파괴하려는 성향을 내포하나 깨어있는 동안은 물리적 한계에 부딪혀 억압받다가 아마도 신체의 피로회복을 위해 신체를 조정하는 기능을 꺼둔 동안 활동하는 것이라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수면은 거의 신체의 회복을 위한 것이고 수면부족에서 일어나는 기억의 혼돈은 신체 기능이 떨어지면서 외부 대상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기존의 기억체계에 대한 반발로 꿈의 기억이 튀어나오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가령 연인 간에 관계가 깊어지면 키스를 하는 것은 손보다 입이 더욱 강렬한 관계에 대한 기억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추상적 기억들도 근본적으로 최초의 신체적 기억들에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면 가능한 주장이다. 둘째는 수면이 정상 기억의 유지를 위한 것이라는 설명으로, 낮 동안의 여러 상황들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잠을 자는 동안 기존의 기억들을 낮 동안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결하면서 재점검함으로써 그러한 연관성들이 "정상적인 것이 아님"을 신체 혹은 신체를 제어하는 장치에 기억시킨다는 것이다. 즉 기억을 연결시키는 동안 신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함으로써 그것이 혹시 낮 동안에 나타나려 하더라도 환각으로 인식하여 반응하지 않도록 훈련시킨다는 가설이다. 언뜻 생각하면 비효율적인 기억 방식이지만, 수면 중의 훈련이 낮 동안의 빠르고 적절한 대응을 어떻게든 이끌어 낸다면 효과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이것은 빠른 신체기억과 느린 잠재기억이 분리 가능함을 가정한 것이다. 또 꿈의 기억이 완전히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의 근원적 욕망이나 리비도 등이 굳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경향성에 의존하여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러한 경향성은 낮 동안에도 여전히 나타나 신체 반응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거부 훈련"은, 만약 경향성이 낮 동안의 정상 기억 체계를 위협하는 것이라면, 필요하다. 굳이 수면을 취하지 않더라도 가만히 있음으로써 비슷한 신체 피로 회복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후자가 전자보다 좀 더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이 거부 훈련의 효과는, 신체의 피로에 더해 너무 많은 기억해야 할 정보를 얻게 되면 약화되므로, 우리는 주기적으로 잠을 청해야 한다. 짧은 시간에 급격한 체력 소모를 한 경우는 렘수면이 별로 없는 깊은 잠을 자는데, 이것은 잠의 목적이 꿈을 통한 기억의 거름보다는 효과적인 체력 회복과 단순 반응 기억의 재생이기 때문이고, 자극적인 감각에서 벗어나 긴장이 풀리거나 많은 새로운 정보를 얻은 뒤에 잠이 오면 이것은 체력 회복보다는 꿈을 통해 새로운 기억들을 기존의 기억과 연결시켜 훈련하기 위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꿈은 ‘낮 동안의 빠른 사유를 위한 밤 동안의 계열 상 교통정리’,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특이점들이 신체가 마비된 동안 결합하고 밀려나는 계열 상의 전쟁’이 될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지 않고 너무 많은 기억들을 쌓다보면 그 기억들을 연결시킬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져, 당장 수많은 기억을 떠올리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낮 동안에 신체가 감당하지 못하고 착오를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꿈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과학적 탐구가 부족하다는 것 이전에 스스로도 꿈 자체를 정확히 떠올리기가 힘들다는 점에서 위의 이야기는 너무 막연하다. 그러나 사유를 계열로서 분석하려면, 그리고 ‘자아’ 개념을 해체하려면 반드시 탐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계열로서 꿈을 탐구한 위의 이야기가 타당하다면, 우리는 사유 너머의 무엇을 사유 너머로써 도달하려 한 여러 종교적 시도들을 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이 길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수면 상태에서는 신체 감각을 인식하는 기능과 신체를 제어하는 기능이 꺼진다. 그리고 수면은 기억을 정리하는 데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위의 기능을 끌 수 있다면, 혹은 끄지 않더라도 비슷하게 기억을 정리할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가 우리의 사유가 현실적인가를 검토할 수 있는 것은 신체 감각이 제 기능을 하고 있을 때이다. 이는 우리가 꿈 속에서는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알아채지 못하다가 완전히 꿈 속이 아닌 가수면 상태의 공상에서는 어느 정도 걸러낼 수 있는 것을 볼 때 추측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기억의 계열을 현실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수면 상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자동적으로 현실의 변화에 맞게 기억을 정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론적으로 의식 상의 ‘자아’ 개념이 필요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자아’ 개념은 다양하게 변화하는 감각 경험에서 특이점을 분리하고 종합하여 시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도구인 언어에서 ‘나’라는 어휘가 차지하는, 마치 좌표평면에서 ‘0’이 차지하는 것과 같은 위치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뒤에서도 보겠지만, 이렇게 시간을 고정시키려는 사유의 움직임, 이 글에서 ‘관성’이라 부르는 것에서 벗어날 수록 사유 구조는 현실의 계열 상의 분화를 더욱 잘 반영하여 변화하고, 의식 상의 ‘자아’ 개념에서 자유로워져 그 너머의 구조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기존의 종교에서 쓰는 방식은, 새롭고 충격적인 자극으로 지금의 사유 구조로는 생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위협을 주어 현실의 변화에 집중하도록 하거나(극단적 고통과 죽음의 체험을 강조하는 종교), 사유 활동을 의식적으로 멈추도록 노력함으로써 새로운 현실 감각 경험이 기존의 계열에 방해받지 않고 그 변화 자체에 가깝게 인식되도록 하거나(가수면 상태에 빠지는 명상법), 모순되는 문장에 집중함으로써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유를 해체하는 방법(선불교의 화두) 등이 있다. 이러한 종교적 방식들을 기본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던 철학적 관점은, 우리가 ‘의식 너머의 관조’를 말한다면 다시 검토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사유’를 사유하고 있으므로, 말하자면 사유에 갇혀 진정으로 ‘사유 바깥’을 사유하는 길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4. 사회와 사유 구조

이제는 위에서 논의한 ‘사유 구조’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의의가 있는지에 대해 논할 것이다. 이 논의는 우선 ‘왜 사유를 하는가’, 더 정확히는 ‘왜 사유는 이루어지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4. 1. 생명, 폭력, 관성

사유는 위에서 보다시피 감각 경험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리고 고정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기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정하게 배치됨으로써 코드화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의 질문을 ‘왜 시간을 고정시키려 하는가’로 대치할 수 있다.

시간을 고정시키는 것은 사실 넓게 보아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행위이다. 인간이야 물론 언어 생활을 보면 알 수 있거니와, 다른 생물들도 감각 경험을 분절하고 대상을 개체로서 파악하며 그에 대한 반영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론적으로 말해, 개체로서 생존하고 번식하는 모든 생물들은, 그것이 외부의 대상에 대해 어떠한 행위로써 생존을 획득해야 하므로 그 대상을 인식하고 스스로에게 자기동일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생물의 존재 자체가 그 자기동일성의 결과물이자 일정하게 배열되어 어느 정도 고정된 물질의 계열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고정시킨다. 물론 여기서는 어디까지를 사유로 볼 것인가, 즉 그 자기 동일성의 정도가 생물마다 ‘자아’ 의식의 정도 차이로 나눌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논증하기 어려우므로 일단 제쳐두겠다.

그렇다면 무생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어떠한가. 우리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계열’이라는 주제에 맞춰 볼 때에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자기조직화이다. 물질이 일정한 배열로 조직되고, 그것이 일회적이지 않고 정보가 유전되어 반복되는 것. 따라서 일정한 배열로 조직된 무생물의 사물일지라도 그것은 해체의 역방향, 즉 생성의 방향으로는 변화할 수 없다. 따라서 무생물이 시간을 반복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생명이 시간을 고정시키는 이유를 탐구해야 한다. 일차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개체의 생존, 혹은 넓게 보아 종의 유전을 위한 것이다. 즉 개체로서 살아남아 후손을 남기려면 외부 대상을 조작 및 해체, 넓게 보아 “폭력”을 행사해야 하며, 이 폭력의 주체로서 ‘자아’의 관념, 혹은 자기 동일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가능한 반론 중 하나는 자살이 있겠지만, 이는 뒤에서 보듯이 관념적 사유가 주요한 생존 도구가 된 생물, 특히 인간에 국한된 문제로서, 이러한 틀에서도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일단 이 문제는 뒤로 미루고 시간을 고정시키는 것이 생명의 특권이라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다시 말하면, 생명은 반복적으로 그 존재 자체와 그것의 행위로써 시간을 고정시키며, 이는 그것의 생존, 즉 시간의 고정에 대한 반복을 지속시키기 위해 외부 대상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도록 하고, 진화론에 의하면 그 폭력이 다시 새로운 자기조직화를 부른다. 즉 생명은 맹목적인 폭력 기계, 시간을 반복적으로 고정시키는 멈추지 않는 시계인 것이다. 이 때의 자기조직화, 즉 ‘자아’를 구성해 가는 과정을 이 글에서는 ‘관성’이라 부르도록 하겠다. 이는 사유 구조를 물리학적으로 사유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며, 실제로도 물리학에서와 비슷한 결론을 도출할 것이다. 즉 ‘관성’은 사유구조에서도 단순히 ‘자아’를 구성하는 움직임에 더해 그것이 기존의 경향성을 유지하고 외부의 힘에 저항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겠다.

4. 2. 사회와 관성

이제 초점을 생명에서 인간으로 다시 옮겨오자. 인간을 여타 생물과 뚜렷이 구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것의 문명이므로, 우리는 사유 구조의 움직임에 더 다가가기 위해 인간의 사회를 탐구해야 한다. 지금까지 관찰된 모든 문명사회는 소수가 다수를 통치하는 구조였다. 이는 ‘통치’라는 용어에서 인격적 지배의 요소를 최대한 제거하고 정치적 영향력의 행사로서만 사용한다면 현대 민주주의 사회도 포함한다. 개인적 능력의 합으로만 보면 소수는 항상 다수보다 열등하므로 소수가 다수를 지속적으로 규제하는 구조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생각한다면 통치하는 소수의 얼굴들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다수에 의해 사라져야 하지만, 통치하는 소수는 현대에도 엄연히 남아있다. 정치인과 대중들의 인격적 차이는 부정되나 정치인이 대중 한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분명 대중 한 사람이 정치인에게 끼치는 영향력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가 유지되는 이유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소수의 결집된 폭력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다수가 소수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결집되었을 때뿐이다. 그러나 집단이 커질수록 목적이 급박하고 단순한 것이어야 하고 특히 소수의 결집된 폭력을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다수를 결집시킬 수 있기 때문에, 통치하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 즉 ‘혁명’이라고 불리는 일들은 다수의 생존이 위협받거나 통치 체제가 흔들리는 시기에만 성공하였다.

둘째로는 생존을 위한 공포 때문이다. 고대 폴리스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행위에 기반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노예제로써 자유민들이 생존의 문제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모두가 노동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정치인의 행위마저도 노동으로서 평가되며 이는 곧 개인이 타인에 대한 행위를 잊고 스스로의 효용을 위해서만 행동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리주의적 인간이 바로 경제학적 인간이며, 원자화된 이들은 마치 물리학에서 관찰되는 원자처럼 사회과학적 법칙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정확히 말하면 생존보다는 그에 대한 공포에서 오는 행동이다. 종종 우리는 통계학적으로는 평균에서 많이 벗어난 소수의 극단치에 불과하지만 생존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개인의 사례를 볼 수 있고, 또 그러한 사례들이 역사적 변화를 기록하는 데 특징지을만한 특이점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자신의 행위를 확인하고 기억해줄 자유로운 타인의 부재, 즉 공허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가령 역사적으로 ‘정의롭다’라고 생각한 일을 위해 희생하려는 개인이, 만약 그를 기억해 줄 동료들이나 역사가가 존재할 확률이 희박하다면 그러한 일을 쉽게 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자발적인 정치 참여로 공동체가 유지되었다고 하는 고대 폴리스의 예를 들면, 폴리스에서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행위를 폴리스가 기억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위에서 본 세 가지 이유는 모두 ‘생존을 위한 공포’라는 말로 종합할 수 있다. 세 번째 이유가 의문스러울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의 삶이 감각 경험 자체의 삶이 아니라 사유로 걸러진 삶임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 자체가 아니라 사유 구조 상의 ‘나’의 생존, ‘나’의 위치라는 것이다. 자살의 문제를 보자. 생존을 위한 기제인 사유는 끊임없이 현실과 사유 구조를 비교하고 그 둘을 일치시키려고 한다. 이 때 사유 구조 상에서 '나'는 변화하는 구조 자체가 아닌 그 안에서 다른 허상들에 의해 정의되는 하나의 허상이므로, 다른 경험들이 사유 상에서 '나'의 위치를 낮은 가치의 계열로 밀어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곧 존재 상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나는 곧 존재들 사이에서 미미해져 버리고 사유 상의 관성은 그러한 구조의 위치를 현실 세계에서 실현하기 위해, 즉 작아져 버린 '나'의 사유 상의 위치에 맞추어 존재하는 세계에서 그대로인 나와의 괴리를 없애고자 현실의 나를 죽인다. 한편으로는 '나는 항상 그대로 살아있다'고 외치려는 욕망도 있지만, 사유 구조의 관성은 강력하고 적절한 외부의 충격이 없는 이상 기존의 경향성에 대해 일관적이며, 항상 안정되고 고정된 인식과 존재의 관계를 지향한다. 생존을 위한 도구적 기제인 관성은 사유 구조의 유지를 위해 나를 파괴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극단적인 현상을 병리적으로 보려 하지만, 사실 이 관성의 틀에서는 이러한 결과는 순전히 우발적인 것으로 설명된다. 반대로 말하면, ‘희생’의 계열적 위치가 사유 구조에서 중요해지고 ‘나’의 위치가 그것과 연결되어 ‘위대함’과 ‘숭고함’의 계열에 위치하려는 경향성이 생겨난다면, 관성은 그 경향성을 유지하기 위해 마치 외부 대상을 죽이듯이 현실의 나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유를 ‘생존을 위한 기제’로 설명할 때 생존 자체가 아니라 사유 구조(자기동일성)의 유지, 즉 관성이 우선함을 생각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문명 사회가 사유 구조의 관성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유지의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인간의 관성은 사유 구조의 분화에 맞춰 현실 세계를 조작하려 한다. 단순히 말하면 외부 대상을 포착하고 폭력을 행사하여 사냥하는 동물의 삶이 조금 더 복잡해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사유 구조 자체를 고정시키려는 노력인 언어를 통해 동물보다 더욱 추상적인 개념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즉 사유 구조가 각 개체에 자기동일적으로 고유하고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중인데 반해, 언어 체계는, 특히 수학에 가까워지려는 언어일 수록 개체를 뛰어넘어 변하지 않는 객관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언어가 새로운 현실 세계의 축으로 등장하면서, 우리는 스스로의 사유 구조를 다른 현실과 비교하듯이 언어 체계와 비교하여 스스로의 사유 구조를 수정하고, 타인의 언어 행위를 통해 타인의 사유 구조를 추측하여 비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현실의 대상이 됨으로써 사유 구조에 영향을 끼치며, 결과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사유구조는 언어와 언어를 통한 타인의 폭력에 규제되어 비슷한 경향성에 대한 관성을 갖는다. 또한 사회적으로 이러한 경향성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비정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된다.

이 때 주의할 것은, 이렇게 구성원의 사유 구조를 강제하는 외부의 폭력의 주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시작이 각자의 관성에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사유는 위에서 말한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구성되며, 이 사유를 통한 폭력이 강력하고 집중될 수록 각 구성원들의 생존 가능성은 높아지기 때문에 사유 구조들을 통제할 사회가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야생 상태에서 인간은 살기 위해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죽여야 하지만, 문명 속의 인간은 언어를 통해 규정된 일정한 관성에 따르기만 하면 생존에 대해 별 걱정 없이 간접적으로 사회의 폭력의 결과물을 나눠 가질 수 있다. 대신에 각 구성원의 생존의 안녕을 담보하기 위해 어디선가는 그에 상응하는 폭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외부 대상에 대한 폭력 없이 생존하는 생명은 관찰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생물로서의 직접적인 폭력의 행사를 포기하는 대신 생존의 안정성을 얻은 것이며, 이렇게 포기된 폭력은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 ‘기아’, ‘착취’ 등의 이름 하에 집중적이고 자동적으로 행사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집중적’이라는 것은 ‘대규모이자 역사적으로’라는 의미이며 ‘자동적’이라는 것은 ‘실제 폭력의 원천인 각 구성원은 그 폭력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때만큼보다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이 글의 관점에서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하나도 없다.

4. 3. 근대 과학과 경제학

앞서 ‘관성’은 ‘사유 구조에서 여러 허상들이 연쇄적으로 분화하려는 어떠한 경향성이 발생했을 때에 그 경향성을 극복할 새로운 계열이 미분화(differentiation)하기 전까지 그 경향성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제기할 물음은 ‘경향성은 어떻게 발생하는가’이다. 이것은 물리학의 ‘중력’ 개념에 비유할 수 있다. 즉 한 물체의 질량이 클 수록 다른 물체를 잡아당기는 힘이 커지는 것처럼, 한 허상과 강력히 연관될 수 있는 허상들, 즉 감각 경험이나 인상들이 축적되면 그 계열을 강화할 새로운 허상이 계속 분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 구조의 중력은 과학 자체의 탐구 과정과 과학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과학에서 현상을 탐구하는 방식은 귀납적 방법인데, 일정한 가설 하에서 현실의 자료를 수집하여 가설과 비교하고 이를 수정하거나, 현실의 자료들에서 공통점을 찾아내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는 방법이다. 이 때 가설과 합치되는 현실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가설은 강화되고 그것을 설명할 공식과 이론들이 등장하여, 결국 그 가설 자체가 하나의 이론 체계 혹은 학문이 되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가설의 기본 가정에 위배되는 사례가 발견되고, 그것을 기존의 가설로 설명하려는 시도의 실패가 반복되면, 그 가설은 폐기되고 새로운 사례를 포함하여 설명할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는 것이다. 즉 과학 활동에서 하나의 가설이 성공하는가의 여부는 그 가설에 성공적으로 연관될 수 있는 경험 사례가 얼마나 반복되는가, 그리고 그 가설을 뒤집을 수 있는 충격적인 반례가 등장하는가에 있으므로, 이 글의 ‘중력’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과학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중력의 변화를 지식의 단선적 확장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기존 가설을 새로운 가설로 대체하는 것은 더 많은 경험 사례를 포함하기 위한 전진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들이 수학적 논증 방식과 수학적 도구를 일상 언어 대신 들여옴으로써 사회에서 언어로써 각자의 사유 구조를 객관화하려는 움직임보다 더욱 강력하게 객관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모두가 같은 연구방식과 같은 의미를 가진 과학 용어들을 사용하고 수학자처럼 사유하도록 훈련받는 것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수학만큼의 객관성을 지향하는 과학 또한 인간의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사유 구조에 매여 있음을 보여야, 사유 구조로 모든 인간의 활동을 바라보고 더 나아가 생성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우리의 논의가 계속될 수 있다. 뒤에서 보겠지만 근대 과학의 활동 자체가 기저에 들뢰즈가 그 너머를 생각하던 의식 상의 ‘자아’, 그것도 ‘객관적 자아’의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과학적 명제를 보편명제와 확률명제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보편명제는 뉴턴의 ‘F=ma'와 같이 보편적으로 같은 투입값에 대해 같은 결과를 나타내는 명제이다. 이에 반해 확률 명제는 ’원소의 반감기는 평균적으로 그 원소의 질량이 반감되는 기간이다‘와 같이 보편적인 결과가 아닌 확률적 기대치만을 나타내는 명제이다. 먼저 보편명제의 한 예로 자유낙하의 법칙을 생각하자. 같은 물체로 같은 상황에서 실험했을 때 보통 항상 같은 결과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보장할 수 없는 진술이다. 낙하하는 동안에도 중력장에 영향을 끼치는 다른 물체들의 위치가 계속 변화하며, 중력장을 완전히 차단한 실험환경, 즉 현실세계와 분리된 시공간이라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후에 발견된 상대성 이론을 고려하면 시간과 공간 또한 주변과 대상의 운동에 의해, 보통 거의 고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수치이나, 변화한다. 따라서 이러한 보편명제는 현실 세계에서는 근사적으로만 참이다. 즉, 보편명제는 확률이 매우 높은 확률명제의 일종이며, 항상 새로운 경험과 가설의 발견에 열려있다. 오히려 소수의 반례들에는 보편명제가 확률명제보다 취약한데, 확률명제에서는 그것을 극단치들로 명제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보편명제는 기존의 과학자들에게 말 그대로 보편적이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 확률명제를 보자. ‘확률’은 이제 과학의 영역을 넘어 일상 생활에서도 흔히 쓰이는 어휘가 되었지만, 수학적 확률의 본래 정의는 선험적 확률로서, 모든 가능한 경우의 수를 사유하고 그 중 목표한 경우의 수의 비율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통계학적 확률은 과학에 사용되는 ‘확률’의 의미로서 과거의 반복시행의 결과를 토대로 구하는 것이다. 후자가 전자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먼저 수학적 확률을 살펴보면, 이 개념 하에는 ‘무지’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동전을 던질 때 각 면이 나올 확률이 1/2라는 것은 동전의 각 면이 나오기 위해 필요한 투입값을 모른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항상 앞면이 나오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에 근사한 방법을 안다면 실제 시행에서의 확률은 1/2가 아닐 것이다. 이를 과학에 적용해 보면, 갈릴레오의 자유낙하법칙보다는 현대 물리학이 더 많은 정보들을 갖고 더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낙하운동에 대해서도 확률적으로 더 정확한 예측치를 내놓는 것과 같다. 수학적 확률이 선험적이라면,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그것은 경험적으로 진술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므로 선험적 의미를 말하려면 선험의 영역에서만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이는 일종의 선험적 진술이 되고자 하는 보편명제를 말할 때에도 해당된다.

이러한 구분을 혼동하여 등장한 개념이 ‘통계학적 확률’인데, 이미 알고 있는 대상들에 대한 사고 실험으로 논증하곤 하는 선험적인 수학적 확률과는 달리 현실의 새로운 경험 사례를 관측해야 하는 과학은 실제로 반복 시행하여 자료를 얻음으로써 확률값을 얻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과학 활동에 요청되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엄연히 선험적인 ‘수학적 확률’과

다른 의미에 속하지만, 확률명제가 과학의 규칙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령 ‘동전의 앞면이 나올 확률은 1/2이다’라는 명제가 각각 수학적 확률과 통계학적 확률 진술로서 발화되었다고 하자. 전자는 알다시피 ‘동전’이나 ‘앞면’의 개념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오직 가능한 경우와 목표 경우의 이론적 비율이 중요하다. 그러나 후자는 1/2의 근처를 오가는 실제 시행 결과를 근사해서 구성된 진술이며, 더 중요한 것은 그 진술이 다음 시행에 대한 확정된 진술의 근거가 될 수 없고, 그 자신도 다음 시행에 대해 열려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시행에서 동전의 앞면이 1/2만큼 나왔다고 해도, 앞으로 계속 뒷면만 나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확률명제가 과학적 규칙이 된 후에는 그것 자체로 하나의 관성이 되어 과학자의 사유를 고정한다. 통계학적 확률이 마치 수학적 확률처럼 사유되고,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련의 사례들은 통계학적 확률에 바로 반영되기보다 확인하지 못한 오류가 없었는지 검증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에서의 ‘확률’ 개념은 무지를 ‘아는 것’, ‘객관성’의 계열에 연관시키고 과학자들에게 확률적 진술에 대한 반복 경험을 수집하도록 하여 진술의 중력을 강화하며 그 자체로서 과학자들에게 과학 활동의 관성적이고 단선적인 안내자가 된다. 마치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객관적 규범의 계열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과학자 사회도 각 과학자에게 단선적 확장의 과학사를 가르치면서 그 확률명제들에 기반하여 탐구할 것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계열들이 엮여서 어떤 허상이 드러날 것인지를 아는 것은, 뒤에서도 보겠지만 과거의 반복된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다. 그러한 이론은 철저히 관성에 종속된 사유로서, 관성에 따르다가도 다른 계열과의 역동적인 얽힘으로 새로운 경향성이 생겨나곤 하는 사유 구조와 현실의 구조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관성은 사라지고 생성된다.

근대 과학이 이처럼 객관성을 지향하는 것은 그 기저에 ‘객관적 관찰자’의 개념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 시작의 특이점을 데카르트로 보면, 물질과 정신을 완전히 분리하고 물질 세계에는 양(量)적인 성질만을 남김으로써 수학적 관찰 대상으로서의 물질과 관찰 주체로서의 자아가 등장한 것이다. 이 때의 ‘자아’ 개념은 ‘신체’로부터도 독립된 것이기에 마치 좌표평면의 ‘0’처럼 그 자신은 아무 것도 갖지 않은 채 고정된 위치에서 무한히 뻗은 외부세계를 관찰하고 그 위치를 객관적으로 명명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허상’의 개념을 통해 보면 사유 구조가 생명 활동으로서 현실 세계의 구조의 결과물이자 반영이며 현실의 구조 또한 사유 구조에 의해 변형되고, 더욱이 이 구조들은 끊임없는 계열들의 교차에 의해 변화하므로 위와 같은 이원론은 깨진다, 혹은 하나의 사유 계열로서 포섭된다. 또한 의식 상의 ‘자아’는 구조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므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리고 ‘사유 구조’의 관점에서, 과학은 드러나지 않은 잠재적 허상들을 예측하는 것이 목적인데, 위에서 보았듯이 허상은 단절적으로 분화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연관된 허상에 의해 그와 연속된 배경을 포함하여 드러난다. 따라서 과학이 예측하는 허상은 미래에 드러날 허상 자체가 아니라 사유 구조에서 그 과학 이론의 계열에 연관된 새로운 허상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선험적 진술을 지향하나 언제나 중력에 의해 계열 안에 갇히곤 하는 것이 과학 활동이라 하겠다. 이러한 ‘객관적 주체’의 한계는 이미 과학 자체에서 양자 이론의 대두로 드러나고 있다.

이상의 논증으로 보아, 과학 또한 ‘사유 구조’의 개념으로써 설명 가능하며, 관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과학 또한 다른 언어 활동과 마찬가지로 수학만큼이나 시간을 고정시키려는 시도가 항상 현실의 변화, 구조의 변화를 맞닥뜨리면서 좌절되는 경우라 하겠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사회가 언어를 통해 구성원의 공포를 해결하고 폭력을 간접적이고 집중적인 것으로 만들 듯이, 과학 또한 사회 구조의 한 축이자 그러한 기제를 스스로 내포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에서의 일상 언어보다 더욱 강력하게 시간을 고정시키고 현실을 객관화하는 수학을 사용하는 과학은, 비록 그 대상이 한정되어 있지만, 사회보다도 더 관찰 대상을 완전히 공간화하고 통제할 수 있는 상태를 지향한다.

이제 문제는 그 관찰 대상이 인간이 될 때인데, 이러한 경향의 대표격인 주류경제학이 더욱 수학적 도구를 활용하고 통일된 연구 방식으로 수렴하고 그것의 예측력 또한 정교해진다는 것은, 주류경제학의 관찰 대상인 ‘시장에서의 인간’의 표본이 증가하고 그들의 행동이 마치 물리학의 원자들처럼 정형화된다는 것과도 같다. 이것이 경제학 자체의 발전의 결과가 아닌 것은 산업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주기적 경기 순환을 관찰하기 힘들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제학 등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은 위의 과학 활동의 특징들을 어떻게 드러내며, 그것이 왜 현대에 들어 각광받는가?[각주:11]

경제학은 무엇에 대한 욕망이 왜 생겼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물질세계를 재조정하는 과정에만 관심이 있는 학문이다. 이 때 각 개인의 사유 구조는 비슷한 대상들에 중점을 두는 것도 있고 다른 대상들에 중점을 둘 수도 있기에 자신의 그것에 맞게 자신의 소유 바구니를 채우려는, 즉 현실을 사유 구조에 맞추어 조작하려는 관성적 "힘"에 의해 교환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힘’ 개념의 등장은 다른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상의 자발적 의지, 주체성을 박탈함으로써(가령 근대 물리학의 제일법칙인 관성의 법칙이 그 전까지 자동적 자연에 속해 있던 사물에게 적용되었을 때처럼) 인간의 사회적 운동에 대한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다른 과학처럼 사유 구조를 무시해버리므로 ‘유일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를 기반으로 한 피상적 관찰로서, 외연적이고 확률적인 명제로만 진술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경제학의 이상은 다수의 효용(이 글의 논지에서는 ‘사유 구조에 가깝게 주변의 소유물들을 조정하려는 욕망’에 가까우며, 이 욕망에는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정상적” 계열이 큰 영향을 끼친다 - 모두가 다른 것을 원한다면 고도의 대량 생산 체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에 최대한 맞추어 물질을 분배하는 것이므로, 서로 다른 사유 구조를 동시에 고려하기 위해 '객관적 가치'의 개념이 필요하며 이는 거꾸로 사유 구조와 그것이 표현되는 효용이 관성적이어야 함을 뜻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이전의 효용구조에서 연속적이고 일관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과거에 근거하여 교환 관계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담보하는 방법은 실제로 그가 항상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며, 일시적 소비보다 소유 자체를 위해 교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경제학에서의 소유가 그 개별 대상 자체보다는 미래의 소비 및 교환 가능성과 그것이 주는 생존에 대한 공포의 제거, 즉 사회의 규범적 계열로의 참여를 위한 것이므로 활발한 교환이 가능하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경제학이 고도로 발달하고 예측이 정교해지는 것은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규범적 계열이 ‘자본’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고대 농경 사회에서 ‘토지’가 다른 대부분의 문명 생활의 개념들과 연관되었듯이, 현대인의 사유 구조에서 ‘자본’은 많은 허상들을 불러낼 수 있는 열쇠인 것이다. 이렇게 다수의 사유 구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앞서 보았듯이 어떠한 외부 주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존, 더 정확히는 사유 구조의 안정을 위해 폭력을 대신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낸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 즉 사유 구조의 관성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리고 ‘자본’의 규범적 계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록 경제학적 경험들은 성공을 반복하며, 그것이 그 계열을 중력으로서 강화하고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전까지의 여러 사회의 규범적 계열들은 모두 외부의 강력한 충격, 즉 새로운 허상들과 계열이 분화하면서 그 중력을 잃어버렸다(외부의 충격이 없는 한 계열은 관성적으로 유지된다). 가령 중세 유럽은 외부 문물의 유입과 전쟁의 발발 등으로 경제 구조와 기독교적 세계관이 모두 맞물리며 변화하는 등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의 계열도 그 바깥을 사유하려면 그것을 깨뜨릴만한 새로운 경험이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단순히 지리적 요건만을 살펴보면,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전 세계를 하나의 구조로서 통합하는 중으로 보인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커다란 계열 안에 배열되는 것이다. 이 단일한 경향성의 엄청난 관성에 대해, 다른 계열이 분화하여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는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처음 대두하는 문제라 하겠다. 어쨌든, 과학이 모든 대상에 대해 적용되는 보편적인, 즉 단일한 계열 상의 지식을 추구한다고 하면, 경제학은 바야흐로 과학에 가까워지고 있다.

4. 4. 관성의 너머 - 피라미드 구조[각주:12]

지금까지의 논의로 보면, 우리가 문명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이상 우리의 사유 구조는 사회의 규범이 만들어내는 관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사유 구조가 그 관성을 ‘안도감’ 혹은 ‘욕망’의 형태로 표출하는 것, 혹은 그러한 ‘욕망’으로 구성되는 것이지만. 또 반대로 문명을 떠날 수도 없는 것이, 우리가 생존에 대한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수 천 년간 쌓아온 것들을 모두 무너뜨리고 일상적인 살육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열적 사유 구조에서는 어떠한 윤리가 가능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새로운 윤리는 무엇보다 ‘공감’에 기초해야 한다. 연쇄적이고 자동적인 계열 상의 분화, 특히 습관화되어 반성되지 않는 사유 활동의 형태로 나타나는 관성은 그것을 능가할 만한 새로운 계열이 등장해야 새로운 경향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사회적 규범이 사유 활동을 이끄는 척도가 되는 현실 세계에서는, 새로운 의미를 상상해 내는 것이 어렵고, 새로운 사건을 발굴하는 것도 이미 그 사회적 환경이 규범에 맞도록 구성되었기에 흔한 일이 될 수 없으며, 새로운 계열을 따라 사유하는 개인은 자신의 기존의 계열을 변화시켜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언행을 통해 드러나는 경우 겪어야 할 사회 구조의 관성에 의한 폭력을 견뎌내야 하기에 찾아보기 매우 힘든 일이다. 또한 이러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낸다고 해도 관성이 사유 구조에서 작용하는 방식, 즉 계열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방식을 알지 못한다면 다시 새로운 규범적 계열에 사유 구조를 의탁하므로, 새로운 윤리는 관성이 사유 구조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알고 새로운 계열을 생성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계열을 생성해 내는 것은 들뢰즈 식으로는 빈 칸, 중첩된 의미인데, 관성에 의해 사유 구조가 닫혀지지 않고 변화하도록 하려면 한 허상에 항상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도록 관성을 길들여야 한다.[각주:13] 말하자면 경험에 대해 습관적이고 정형화된 의미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다층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의 변화를 관찰하려고 하는 문학적 사유 방식을 습관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를 그대로 인식하고, 특히 타인이 부여하는 다른 의미들을 거부하거나 추종하지 않고 자신의 사유 구조에 포함시키는 것을 ‘공감’이라 부르도록 하겠다. 이 ‘공감’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의 규범적 계열에 맞추기 위해 각자의 다양한 의미들을 무시하도록 하여 구성원 간의 충돌을 막고 사회를 유지하는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각자의 계열을 그대로 중첩적으로 포함시킴으로써 사유 구조를 더욱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고 그 유연성으로 충돌을 막고 사회를 유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생존에 대한 공포 때문에 폭력에 대한 권리를 위임받은 사회가 그 폭력적 효율성을 위해 점점 단선적이고 닫혀진 계열로 미분화하고 그 폭력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 필연적인 역사는 아님을 나타낸다. 즉 문명의 발달이 전체주의로의 진행과 항상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공감하는 사유 구조’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가끔 우리는 ‘포용력이 좋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을 만난다. 많은 경우는 그러한 평판을 위해, 자기동일성의 욕망을 위해 다른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지만, 정말로 남의 마음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같은 어휘를 말하더라도 각자의 의미, 각 사유 구조 상의 위치는 다를 수 있는데, 그런 이들은 그 차이까지도 아는 듯한 언행을 하는 것이다. 더 확실한 예로는, 학문의 역사 그 중에서도 철학사나, 종교의 역사, 그 외에 작은 집단의 역사들에서도 흔히 창시자들이나 거두들의 언행이 후세들에게 오해되어 집단 내에서 분란이 일어나거나, 그들이 하지 않은 말들이 날조되는 등의 과정을 통해 최초의 의미가 정형화되고 교조적이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동시대에 같은 이론을 접한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그 이론에서 더 많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 그 시대를 대표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특이점이 되었고, 고대의 여러 사상의 창시자들은 아예 기록을 남기지 않거나 사상의 핵심 개념만을 요약하고 제자들에게는 서로 다른 언행으로써 가르친 경우가 많다는 것은, 같은 언어나 물리적 사건에서도 각자가 떠올리는 의미 자체 뿐만 아니라 의미의 중첩된 정도에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한 허상에는 의미가 계속 중첩될 수 있으며 그럴수록 구조는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그 의미가 파편적이 될수록 구조는 고정되고 그에 기반한 언행이 정형화되고 교조적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사유 구조’를 평면이 아닌, ‘층위’ 개념이 도입된 입체의 이미지로서 사유해야 한다.

이에 대해 이 글에서 제시하는 것은 피라미드 모형이다. 피라미드의 각 면은 계열이고, 위로 올라 갈수록 더 많은 의미를 포함하며 계열 간의 거리가 짧아져 그 변화가 사유 구조에 끼치는 충격은 적다, 이는 위로 올라가 의미가 중첩될 수록 관성의 저항이 작아지기 때문에, 즉 중력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위에 있는 사유는 영어 속담의 ‘Great minds think alike'에서처럼 다양한 의미와 그것에 기초하는 타인의 언행을 더 많이 이해하며, 아래 단계에서보다 공감하는 사유에 더 가깝다. 그리고 구조가 역동적이므로 기존의 관성적 계열에서 먼 사건들도 인지할 수 있으며 그 의미를 구조에 포함시킬 수 있다. 또 아래 단계에서의 고정된 사유 구조는 강력한 자기동일성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위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의식 상의 ’자아‘에서 떨어져 사유한다는 의미[각주:14]이자 생존에 대한 공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이며 직접적 및 간접적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때 떠오르는 문제가 되는 것은 ’피라미드의 위로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인데, 이는 사실 앞서 제기한 ’관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이다. 이는 위에서 말한 대로 기존의 개념에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순간의 변화하는 경험에 집중하는 문학적 사유의 방식과 타인의 외연적인 언행의 이유가 아닌 사유 구조를 상상하고 이해하는 역지사지의 방식도 있지만, 우리는 관성을 좀 더 직접적으로 관찰하는 방식, 즉 관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사유 과정을 관찰함으로써 사유 구조 자체의 변화를 직접 경험하는 방식을 탐구해야 한다. 이 때 주의할 것은, 사유 과정을 관찰하는 데에 그 변화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 새로운 관성이 생겨버리고 또다시 사유 구조 안에 갇혀버리니, 사유 구조를 ’구조 형태‘의 이미지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변화만을 관조하고[각주:15]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불교의 명상법에 가까운 방법일 텐데, 사유 구조의 역동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려 한다면 그 변화 자체를 탐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여기서 가능한 의문은 ‘의지’의 문제이다. ‘관성’은 ‘생존의 공포’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다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사유 구조에 갇혀있다. 그렇다면 ‘자기동일성을 넘어서려는 의지’는 자기동일성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의지’ 또한 다른 허상과 같이 우발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우연이다. 누군가는 그런 의지를 분화하고 누군가는 아니겠지만, 그것은 우주적으로 보면 분자운동과 같은 우연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유하는 순간 자기동일성에 오염되어 우리는 쉽게 ‘허무’의 감정에 연관시키게 된다(이 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관찰자로서 대상을 보듯, 마치 좌표평면의 ‘0’처럼 보려한다 - 그리고 이것은 분열의 시작, 삶이 생존 기계로서 사회의 일부가 되는 것, 시간을 잃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는 일상의 수준에서는 여전히 의지의 의미로 남는다. 그러나 ‘사유 구조를 역동적으로 하려는 의지’는 다른 모든 욕망과 달리 사유의 연쇄적이고 자동적인 분화를 끊는 것이므로 방향이 다르다. 어찌보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자유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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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A Kripke, Naming and Necessity, Cambridge, Mass. :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1. ‘시뮬라크르’라고 그대로 옮겨 쓰는 서적도 있지만, ‘분화(differenciation)'와 ’미분화(differentiation)'의 번역과 함께 이 글에서는 다음 서적의 번역을 따랐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본문으로]
  2. “(시뮬라크르의 잠재성이 의미하는) 주변, 잡종성, 그리고 가짜가 지니고 있는 힘은 진짜가 지니고 있는 힘을 파괴하거나 무력화함으로 근대성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주의를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 장시기, 「탈근대성의 인식론: 들뢰즈-가타리의 몸 철학」, 한국비평이론학회 편, 『들뢰즈와 그 적들』, 우물이 있는 집, 2006. [본문으로]
  3. 질 들뢰즈, 「구조주의를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엮고 옮김, 이학사, 2007, p 374. [본문으로]
  4. “(빈칸에 대하여) 이 말들 각각은 마치 하나의 전철(轉轍)처럼 행동할 수 있으며, 우리는 다양한 궤도를 따라 하나의 말에서 다른 하나의 말로 옮겨갈 수 있다. 단지 하나의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이야기들의 바다를 펼치는 책이라는 생각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Michel Butor,(1962) Introduction aux fragments de "Finnegans Wake". Paris: Gallimard, p. 12;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옮김, 한길사, 2000. p 113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5. 선험적 지식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Soul A Kripke. Naming and Necessity, Cambridge, Mass. :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lecture 1. [본문으로]
  6. 여기서 ‘사유의 구조’는 쉽게 말하면 ‘한 인간이 감각하고 상상하며 기억하는 모든 정신적 움직임의 구조’를 지칭한다. 그러나 ‘사유’라는 말은 자기동일적 자아 이전에 각 허상들, 혹은 특이점들이 분화되어 ‘자아’와 ‘세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한다. 이 때에도 ‘사유가 만들어낸다’ 혹은 ‘사유한다’는 방식으로 글을 쓰겠지만 이는 편의상 그런 것일 뿐 그것의 단일한 주체를 상정한 용법은 아니다. [본문으로]
  7. “(그 점의 충분히 작은 주변인) 이웃관계에서 어떤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그런 점을 특이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웃관계(neighborhood)'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계열‘의 개념으로 보는 ’구조‘에 대한 논의는 위상학의 틀에 빚지고 있다. ; 따옴표 안은 이정우, 『사건의 철학』, 철학아카데미, 2003. p 194. 저자는 이러한 ’특이성‘ 개념이 르네 톰의 급변론을 기반으로 한다고 쓰고 있다. 르네 톰, 『카타스트로피의 과학과 철학』, 이정우 옮김, 솔, 1995, 참고. [본문으로]
  8. 집합 안의 모든 점이 극한점들, 즉 그 점의 무한히 작은 반경의 이웃에도 항상 무한한 다른 점이 포함되는 점들인 집합. [본문으로]
  9. 점 p와 점 p'의 거리가 무한히 작은 양수 ε보다 작을 때 p와 p'는 같다고 정의한다. [본문으로]
  10. 수면 주기는 빠른 안구 운동을 하는 REM 수면기와 NREM(Non-REM) 수면기로 구분된다. 꿈은 렘 수면에는 항상 나타나며, NREM 수면에서는 서파 수면 시에 약 25% 정도 나타난다. REM 수면기에는 NREM 수면기와 달리 몸 대부분이 마비 상태가 된다. 대신 뇌는 가장 활동적인 것으로 관찰된다. 렘 수면에서 나타나는 꿈은 이야기가 있는 영화와 같은 꿈이고, NREM 수면의 꿈은 이야기가 거의 없는 정적이고 불유쾌한 기분의 꿈이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신체적 회복은 NREM의 서파 수면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심리적 회복은 REM 수면기에 일어난다고 본다.; 박창호 외 11인, 『현대심리학 입문』, 정민사, 2000, p 82-85 참고. [본문으로]
  11. 들뢰즈는 정신분석을 ‘리비도적 경제학’이라고 부른다. “리카도가 표상 가능한 모든 가치의 원리로서 양적 노동을 발견함으로써 정치적 혹은 사회적 경제학의 기초를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욕망의 대상들과 목표들의 표상 전체의 원리로서 양적 리비도를 발견함으로써 욕망하는 경제학의 기초를 세우고 있다.” 간단히 이 글과 관련시켜 말하면 ‘노동’이라는 단선적 계열로 모든 가치를 연관시킬 수 있게 됨으로써 양적이고 과학적인 경제학이 가능한 것처럼 정신분석도 자본주의의 발전, 즉 ‘사적 개인’의 발견과 ‘무한한 주관적 표상’의 체계로 욕망이 ‘옮겨졌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앙띠 오이디푸스』, 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4, p 441-448 참고. [본문으로]
  12. “들뢰즈는 철학을 실존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사유하고 [지도]그릴 수 있도록, 나아가 변화와 진화의 힘들에 사건의 위상을 부여할 수 있도록 해줄 개념들의 창조와 디아그람의 생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재작업되고 재생기화된 칸트주의에서 선험적인 또는 현상학적인 주체의 운반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체 없는 선험적 장을 구성하는... 개념들의 도움으로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 이 모델에서 철학은 그것에 빗물체적인 사건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그리고 인간의 조건을 ”넘어“ 사유할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함으로써 인간에, 그것의 신체성을 구성하고 소비하는 유한성의 힘들에 충실하게 머문다. ‘우월한 경험론’을 향한 탐색은...” 즉 철학이 사유 구조 자체를 탐구하면서 그 지도를 그리고 주체가 분해되면, 그리고 그 사실에 충실하려 한다면 우리는 ‘나’로서 살아왔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조건의 삶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주체 이전의 사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윤리여야 할 것이다. ; 따옴표 안은 키스 안젤 피어슨, 『싹트는 생명』, 이정우 옮김, 산해, 2005, p 431. [본문으로]
  13. 들뢰즈의 ‘빈 칸’ 개념은 ‘상징적인 어떤 대상’에 가깝지만, 이는 현실적으로는 하나의 사건을 대할 때에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관성적 의미를 거부하고 이면의 의미를 추구하는, 열린 ‘태도’로 나타난다. [본문으로]
  14. “니체는 신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죽는다는 것을, 아울러 신들은 어떤 신이 자기가 유일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웃다가 죽는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구조주의는 결코 주체를 제거하는 사유가 아니다. 차라리 구조주의는 주체를 분산시키며 체계적으로 분배하는 사유, 주체의 동일성에 저항하는 사유, 주체를 흩뜨리며 이리저리 이동시키는 사유, 그리하여 비인격적인 개별화나 선-개인적인 특이성을 가지고서 언제나 유목적인 주체를 만드는 사유이다.”; 질 들뢰즈, 「구조주의를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엮고 옮김, 이학사, 2007, p 415. [본문으로]
  15. “절대적 내재성은 즉자적으로 있다 : 그것은 어떤 것 안에(dans), 어떤 것에(a) 있지 않으며, 어떤 대상에 의존하거나 어떤 주체에 속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내재성은 실체에 있지 않고, 실체와 양태가 내재성 안에 있다.” 즉 이 글에서 ‘관조’는 주체를 떠나 순간에 가장 가까운, ‘절대적 내재성’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다. ; 따옴표 안의 부분은 Deleuze, "L'immance : une Vie", Philosophie 47(1995), 3-7.; 신지영, 「들뢰즈에게 어떤 윤리를 기대할 수 있는가」, 한국비평이론학회 편, 『들뢰즈와 그 적들』, 우물이 있는 집, 2006.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Posted by SP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