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짓기/감상/짧은글2010. 11. 18. 21:42
1. 머리말

  이 글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중에서도 특히 서론의 제 1장, 「존재물음의 필요성, 구조 및 우위」에 나타난 ‘존재물음’ 논증에 대해 고찰하고 그것이 존재론에 대해 갖는 의의에 대해 검토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섣불리 던지기 전에 그 물음(‘존재물음’) 자체를 문제 삼는다. 그는 되묻는다; ‘오늘날 우리는 ’존재한다‘는 말의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가?’(『존재』p 1).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존재’를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가장 불명료한 개념이기 때문인 것이다(『존재』p 7). 그는 이 존재물음에는 ‘물어지는 것(존재) 이외에 물음이 걸리는 것(존재자)이 속해 있음’을 날카롭게 파악한다(『존재』 p 10). 즉 우리는 존재에 대해 마치 다른 존재자들에 대한 것과 같이 묻고 있지만 실은 이는 ‘평균적이고 막연한 존재이해’(『존재』 p 11)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존재론(혹은 존재물음)은 이전의 그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묻는 존재자를 그 존재에 있어서 통찰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존재는 존재자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며 이전의 존재물음이 항상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를 은폐시켰다면, 그러한 존재물음의 형식에 의해 묻고 있는 존재자(‘우리들 자신’)에 대한 접근만이 존재로 다가갈 남겨진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형식적으로 ‘존재자 자신의 존재양상으로서 그 존재자에 있어서 ’물어지는 것‘, 즉 존재에 의해 본질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라고 표현하며, 이 존재자를 ‘현존재’라고 술어화한다(『존재』p 13). 
  이러한 새로운 존재물음의 구조가, 존재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자로부터 다시 새로운 존재물음을 제기하므로 순환논증이라는 가능한 반론에 대해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존재론이 ’존재‘를 ’전제‘하였’으며, 이는 존재자를 잠정적으로 명료하게 하는 것으로서 ‘일련의 명제가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어떤 원칙의 설정과는 무관하다’고 재반박한다. 다만 존재물음의 형식에서 묻고 있는 존재자, 즉 현존재와 물어지는 존재 사이의 연관을 언급하며 ‘현존재의 (다른 존재자에 대한) 우위는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언급한다(『존재』p 14).
  하이데거는 ‘존재물음의 탁월성이 그 물음의 기능, 의도 및 동기에 관련해서 충분히 한정될 때 비로소 완전히 밝혀질 것’이라고 말한다(『존재』p 15). 존재물음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는 학문의 진보가 ‘근본 틀에 대한 물음에서 성취(『존재』p 16)'된다고 하며, '실증과학의 존재적 물음에 비해 훨씬 더 근원적인' 존재론적 물음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존재론적 물음은 ’소박하고 불투명한 것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존재 일반의 의미를 논구해야 한다‘(『존재』p 18). 즉 존재물음은 ’존재적 학문들에 선행해서 그 기초를 세워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이것이 존재물음의 ’존재론적 우위‘이다(『존재』p 19). 
  이 존재론적 우위에 더해, 존재물음의 존재적 우위를 논증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탁월성을 주장한다. 즉 현존재는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존재적으로 탁월하다(『존재』p 19)'. 따라서 현존재는 그 이름대로 ’그 때마다 자기 자신의 존재로서 있어야‘ 하며, ’실존에 입각해서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 - 이것이 현존재의 존재적 우위이다.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갖는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이론적 물음은 그 ’실존을 구성하는 것‘, ’그 구조들의 연관인 실존성‘의 해명을 목표로 하므로 ’실존적 이해‘가 아닌 ’실존론적 이해‘를 시도해야 한다(『존재』p 20). 그리고 ’이 실존성이 실존하는 존재자의 존재 틀‘이고, ’존재 틀이라는 이념 속에는 이미 존재라는 이념이 놓여 있으므로‘, 현존재를 분석하기 위해서도 존재론적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비현존재적 존재 성격을 가진 존재자를 주제로 하는 제 존재론(하이데거 이전의 존재물음)은 따라서 현존재 자신의 존재적 구조에 그 기초와 동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제 존재론이 나타날 수 있는 ‘기초 존재론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존재는 다른 모든 존재자에 앞서서 존재론적으로 일차적으로 물어져야 한다’(『존재』p 21). 그러나 ‘실존론적 분석론은 궁극적으로는 실존적으로, 즉 존재적으로 뿌리 박고 있’으므로, 현존재에 대한 존재물음이 우선되어 현존재의 존재 가능성이 파악되어야만 ‘존재론적 문제제기 일반의 착수 가능성도 성립한다’ - 이것이 존재물음의 존재적 우위이다(『존재』p 22).
  요약하면, ‘현존재 일반의 존재론적 분석론이 기초 존재론을 형성한다는 사실과, 현존재는 원칙상 선행적으로 자신의 존재에 관해 물음이 걸려지는 존재자로서 기능한다는 사실’로부터 ‘존재물음이 명료한 물음이 되기 위해 현존재가 무엇보다 먼저 존재론적으로 충분히 연구되어야 할 존재자’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며, 현존재는 ‘존재물음 속에서 물어지고 있는 그것(존재)에 대해 그 때마다 이미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존재자’이므로 ‘존재물음이란 현존재 자신에 속하는 본질적 존재경향, 즉 전(前) 존재론적 존재이해(하이데거는 아직 새로운 일반적 존재론에 입각한 존재이해가 세워지기 이전의 존재이해를 이렇게 부른다)의 철저화‘라는 것이다(『존재』p 23).


2. 문제제기 1; 순환논증과 ‘평균적 존재이해’

  첫째로 문제를 제기할 부분은 현존재에 의한 새로운 존재물음의 시도에 대해 순환논증이라고 반박하는 데 대한 재반론의 부분이다(『존재』p 13-15). '존재자를 그 존재에 있어서 규정해야 하고, 다음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비로소 존재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제기하려고 하므로‘ 그것은 순환논증이라는 반박은, 하이데거의 말대로 ’원리적 연구의 영역에서의 형식적 반론은 언제나 비생산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초점을 잘못 맞춘 반박이다. 하이데거가 앞서서 문제 제기한 바와 같이, 존재물음 자체가 다른 존재자에 대한 물음과는 달리 존재를 존재자로 오인 혹은 은폐하는 형식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존재자들 사이에서의 인과관계와 같은 종류의 논리적 관계가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서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자를 그 존재에 있어서 규정해야 한다‘고 할 때, ’규정‘이란 말 속에는 이미 물음에 대한 답이 잠정적으로나마 ’존재한다‘는 가정이 들어있으며, 물음과 달리 답이 어떠한 형식으로든 ’존재한다‘고 표현될 때, 즉 ’규정된다‘와 같은 의미로 ’존재자는 존재한다‘. 우리가 ’그것을 근거로 해서 비로소 존재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제기‘하는데까지 갈 것도 없이, 존재자를 그 존재에 있어서 규정하기 위해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이미 존재자는 존재하고 존재물음은 물어진 것이다(전(前)존재론적 존재이해). 이는 묻고 있는 우리들 현존재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항상 존재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는 실존적 존재자이기 때문이며, 위의 반박은 이를 고려하지 못했기에 또다시 ’존재란 무엇인가‘와 같은 논리적 은폐를 시도하는 반박인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존재’는 지금까지의 모든 존재론 속에 ‘전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어떠한 형태의 존재론적 가정을 깔지 않고서 존재자와 존재에 대해 논증하기란, 동사, 특히 영어의 Be 동사의 예에서 보듯이 문장에 이미 존재를 의미하는 형식(존재이해)이 존재하므로, 불가능한 것이다. 존재를 존재자에 대해 묻는 방식으로 물을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면, 위와 같은 반박은 그러한 점에서 거부되며, 자연스레 새로운 존재론은 묻는 존재자인 현존재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존재를 향한 이러한 주도적 겨냥(존재를 전제한다는 것)은, 우리가 언제나 이미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현존재 자신의 본질 틀에 속하는 평균적 존재이해로부터 나온다’며, ‘(존재의) 전제는, 일련의 명제가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어떤 원칙의 설정과는 무관하다’는 말을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제 1부 제 1편 제 2장 「현존재의 근본 틀로서의 세계-내-존재 일반」의 ‘세계-내-존재’라는 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하이데거는 ‘내-존재’를 ‘내-재’와 구분하여, 후자를 ‘현존재적이 아닌 존재양식을 가진 존재자에 속하는 (공간 관계의) 존재론적 성격’이라고 하는 데 비해 전자를 ‘현존재의 존재 틀로서 실존 범주’라 정의한다(『존재』p 81). 오직 현존재만이 ‘세계-내-존재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세계와 여러 관계를 맺고 다른 존재자와 “접촉”할 수 있다 -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끼리는 만날 수 없으므로 접촉할 수도 없다(『존재』p 84-86).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의 인식작용은, 심지어 관조조차도, ‘만나는 존재자로부터 하나의 관점을 처음부터 이끌어낸다’, 즉 ‘인식하는 현존재는 현존재로서 외부에 머물러 있다’(『존재』p 91-92). 
  또 여기서 ‘평균적 존재이해’는 하이데거가 분석의 출발점으로서의 현존재를 전제하기 위해 도입한 것으로, ‘일상성으로부터 나오고 다시 그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실존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인 ‘일상적 무차별성’을 평균성이라 부르며, 즉 ‘평균적 존재이해’는 ‘현존재를 실존에 관한 어떤 구체적이고 가능한 이념에 입각해서 구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존재』 p 66) 
  그러나 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위의 하이데거의 문장은 그에 대한 또다른 반박으로 되돌아 올 가능성을 내포한다. 즉 하이데거의 새로운 존재론 또한, 그것이 특정한 이론과 언어 틀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이상, 존재물음에 대한 특정한 답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이데거가 ‘What is being?'이라는 형식의 존재물음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What is 'What is being'?'이라는 형식으로 끝나 답하게 된다면 또다시 같은 문제 제기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존재의) 전제는, 일련의 명제가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어떤 원칙의 설정과는 무관’하므로, 즉 현존재는 실존하기에 항상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를 전제하여 답을 내리므로 새로운 문제 제기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이는 그가 어떤 형식으로, 어떤 단계에서 존재를 전제하는지와도 “무관하다”. 가령 하이데거가 세계-내-존재 속에서의 현존재를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현존재가 어떤 존재자를 인식할 때, 그것을 하이데거 이전의 존재론적으로 인식할 때와 마찬가지로 세계-내-존재라는 본질 틀과 존재자와의 은폐된 관계가 문제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적 존재론에 의해...’라고 인용하는 순간 우리는 하이데거적 존재를 전제하고 그것을 마치 존재자처럼 형식화한다. 이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계속 문제만을 제기하는 것 뿐이다. 즉 ‘전제’는 존재자에 대한 술어인데 새로운 모든 존재론들은 “존재”를 전제해야 하므로, 하이데거가 제기한 문제 제기에 걸리게 되고 곧 무한한 존재론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의 사슬에 걸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비생산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 이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문제 제기 하에서는 수많은 존재물음에 대한 물음 끝에 올 진정한 존재론의 가능성이 부정되기 때문이다.


3. 문제제기 2; 현존재와 시간

  두 번째 문제제기는 현존재가 실존한다고 했을 때, ‘현존재의 본질은, 자기의 존재는 그 때마다 자기 자신의 존재로서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존재』p 20)는 것에 대해, 현존재와 시간을 어떻게 연관시킬 것인가이다. 이는 위 문제제기와도 연결되는 것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위에서 밝힌 이유로 현존재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는데,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존재로서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현존재이고 존재자의 존재 양태가 불변일 수 없다면, 이의 변화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끼치는 영향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존재』서론 제 2장 「존재물음을 수행할 때의 두 과제: 탐구의 방법과 그 구도」에 나타난 현존재와 시간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자. ‘우리가 현존재라고 부르는 존재자의 존재의 의미로서는 시간성이 제시되고’, ‘이 시간은 모든 존재이해와 모든 존재해석의 지평으로서 밝혀져야 한다’. 즉 제 존재론에서 존재는 시간에 근거하며 이와 그 제 성격 및 제 양상의 근원적 의미 규정성을 ‘존재 시간적 규정성’이라 부른다. 따라서 ‘존재 시간성의 문제를 개진함으로써 비로소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구체적 대답이 주어진다’.(『존재』p 28-30)
  '시간은 예로부터 존재자의 상이한 영역들을 소박하게 구별하는 존재론적 혹은 존재적 기준으로서 기능해왔다‘. 즉 우리는 존재자의 존재를 파악할 때 그것의 공간적 위치를 인식하듯이 시간적 “위치”를 인식하며, 무시간적 명제와 명제 진술의 시간적 경과, 혹은 시간적 존재자와 초시간적 영원자를 구별하였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현존재의 분석에서 시작되고, 위에서 보았듯이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므로 ‘인식하는 현존재는 현존재로서 외부에 머물러 있다’. 즉 현존재가 만나는 존재자의 변화는 그것에 몰입해있는 현존재의 변화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여기서 존재자에 속한 성질이 아니라 현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만남의 변화를 나타낸다. 이 때 발생하는 문제가 ‘시간은 존재하는가’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가이다. ‘시간이 존재한다’고 답하려면,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현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만남은 항상 변화하기에 ‘시간은 초시간적으로 존재한다’고 대답해야 하며, 이는 ‘What is being'이라는 질문이 존재를 존재자의 문제로 은폐하듯, 시간을 시간에 의해 만나게 되는 다른 존재자들과 동등하게 놓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이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뚜렷한 정의가 있어야 하기에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기존의 존재물음을 넘어서 현존재로부터 존재론을 찾고자 한다면, 시간 또한 존재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물음 형식으로는 규정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는 시간에 대해서도 위 2의 논증과 같이 무한한 물음의 사슬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어째서 시간과 존재는 이렇게 동시에 대답할 수 있거나 동시에 대답불가한 것일까. 그것은 특히 ‘통속적 시간 이해’에서 공간보다 시간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흔히 시간은 일직선 혹은 원형의 선으로 표현되며 그 위에 존재자들이 마치 공간에서처럼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처럼 이러한 존재론을 떠나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를 생각한다면, 기존의 수학-물리학적 공간이 현존재와 존재자의 만남의 양태로 규정되는 것처럼 시간 또한 만남으로 규정된다. 이 때의 시간은 고정된 선이 아닌 변화하는 관계가 되며, 시간에 대해 묻는 현존재는 현존재로서 만남에 존재하므로 현존재는 변화하고, 따라서 현존재는 존재하면서 변화한다 - 혹은 존재하듯이 변화한다. 말하자면 여기서 ‘변화하다’는 ‘존재하다’가 ‘존재’를 술어화한 것이듯이 ‘시간’을 술어화한 것이며, ‘변화하다’와 ‘존재하다’는, 현존재가 실존하고 항상 어떤 존재자와 만나는 이상, 구별할 수 없다. 즉 기존의 존재물음을 넘어서고자 하면 ‘시간’과 ‘존재’는 같은 의미가 된다. 이는 일상적 규모에서는 잘 이해할 수 없으니 우주적 현상을 예로 들면, 우리가 몇 억 광년 떨어진 별을 볼 때 ‘그 별은 “지금” 존재한다’는 진술과 ‘그 별은 몇 억 년 전에 존재했다’는 진술이 동시에 쓰이는데, 이는 일상적 차원에서 대상들을 마주치면 습관적으로 우리와 그 대상 자체가 “같은 시간 속에서 고정된 채” 존재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그 별 빛이 실은 몇 억 년 전 것이라는 말을 들은 후에도 여전히 전자의 진술을 하는 것이라 설명된다. 즉 통속적 시간 이해에서 나와 만나는 모든 존재자들은 같은 시간의 한 점에서 계속 같이 흘러간다. 그러나 세계-내-존재 속의 현존재로서 설명하면, 각 존재자들은 현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저마다의 공간을 부여받는 것처럼 시간을 부여받는데, ‘부여받는다’는 표현은 편의상 쓰였을 뿐 위에서 보았듯이 존재와 시간은 구별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존재 진술은 문제 제기에 직면하게 된다. 즉 현존재가 어떤 존재자에 대해 진술할 때에는 그 존재자와 현존재 자신과의 만남이 적어도 그 진술이 지시하는 만큼의 기간 동안에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하는데, 전술했듯이 새로운 존재물음 하에서 시간은 곧 존재이고 변화하지 않음은 존재하지 않음이므로 위 진술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무시간적인 것(명제)도 ‘일종의 결여의 방식에서 뿐 아니라’, ‘적극적 의미에서도 시간적이다’(『존재』p 30).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 진술은 언제나 근사적이고 잠정적인 진술이 되며, 존재를 새로운 기초 위에 전제하고자 하는 모든 존재론의 진술 또한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4. 맺음말; 논증의 존재론적 의의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존재와 시간』의 서론 부분에만 치중되어 있기에 그 한계가 뚜렷하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최초에 제기한 기존의 존재물음에 대한 문제를 계속 밀고나갈 때에 일어날 수 있는 존재론적 문제들을 검토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가 새로운 존재론의 정립이 아닌 끝없는 존재물음의 해체의 연속일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사유가 딛고 있는 언어의 특성 때문이다. 언어는 변화하는 개별자들을 하나의 공통 어휘로 표현하며 그것의 의미는 사회적으로 사용되면서 수렴하고, 개별자들의 다양하고 재빠른 변화에 비해 평균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언어는 존재자와 그것과 만나는 현존재 간의 시간의 차이를 없애버린다. 이는 수학과 기호논리학, 그리고 그것을 언어로 쓰는 학문들의 경우에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한 언어에서 어휘의 의미는 거의 바뀌지 않고 그만큼 현존재와 존재자의 만남은 규범화되고 변화하지 않으며 무차별적이다(개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의 문제들은 기존의 존재론과 같은 형식으로 새로운 존재론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가정 아래서만 문제일 수 있다. 즉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형식의 물음 너머를 생각할 때 ‘존재란 무엇이다’라는 형식의 답을 포기해야 한다면, 위에서 제기한 해체의 존재론 또한 새로운 형식의 존재론으로 넘어가는 다리 혹은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단단한 가정 하에서만 나타나는 단일한 답을 철학에서 원한다면, 그것은 과학과 다르지 않은 형이상학이 될 것이고 철학의 방법은 과학적 탐구 방법과 유사해질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모습의 철학을 원치 않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면, 소크라테스가 그랬듯이 계속 질문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SP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