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경제학은 본래 산업혁명 하에서 급속도로 팽창하던 시장 영역과 경제 활동을 탐구하기 위해 분화된 학문이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경제 활동이 사회 구조 전반에 끼치는 영향이 절대적으로 됨에 따라 사회 현상, 더 나아가 결혼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불리던 인간의 행위까지 그 연구 영역을 넓히고 있으며, 다른 사회과학과의 학문적 연계도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경제학적 방법은 대개 경제학, 특히 주류경제학이 다른 사회과학에 비해 엄밀한 수학적 연구 방법을 구축했다는 이유에서 선호되는데, 확실히 현대의 주류경제학에서 수학과 통계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자연과학의 그것에 비견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멀리까지 갈 것도 없이, 19세기나 20세기 초의 경제학 서적만 보더라도 그 때의 수학적 방법은 지금보다 훨씬 비중이 적고, 경제학 연구가 그보다는 더욱 현재 인문학의 연구 방식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그 때에도 분명히 지금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기초적인 수학 도구들은 이미 발견되었음에도 말이다. 아직 그것을 적용할 방법을 발명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한다고 해도, 그 때의 경제학 저술들이 지금의 그것과 다른 것은 도구의 차이만이 아니다. 경제학 초창기의 각 학파들의 논쟁을 보면, 지금 주류경제학 안에서의 논쟁들보다 더욱 가치 중심적이고, 광범위한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주류경제학에서 그것의 공리로 여기고 있는 것들, ‘보이지 않는 손’, ‘합리적 인간’, ‘효용’ 등의 관념이 그 때에는 학계의 뜨거운 감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가치 중심적 논쟁에서 수학적 방법은 그리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혹시 그 때의 경제학에 수학적 도구가 별로 중시되지 않은 것은 그것을 쓰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경제학은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학문이다. 즉 우리는 경제학사를 통해 하나의 학문이 어떻게 성숙한 체계로 발전하는지를 고대부터 시작된 다른 학문보다 비교적 더 생생하고 많은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학문의 생성과 발전을 설명하는 이론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론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다. 본래 토마스 쿤은 이 이론을 자연과학의 발달사에만 적용시켜 설명했지만, 뒤에서 보듯이, 경제학사도 이 이론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그것은 경제학이 자연과학에 가까워지려는 경향이 뚜렷한 사회과학이기 때문이고, 이러한 경향은 경제학의 태동과 존재의 이유에 이미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이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의해 변화되어 왔다고 한다면, 경제학 역시 다른 패러다임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지탱하는 핵(核, Core; 핵심적인 가정)이 있다는 말이 된다. 그 핵이 무너질 때 주류 경제학은 새로운 과학혁명에 직면하며 이는 지금까지 고전 경제학이 수많은 다른 경제학 이론들을 물리치고 주류 경제학으로 남게 된 과정과도 같다. 그 핵이란 바로 미시 경제학 교과서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효용’ 개념이다. 즉 ‘모든 사람은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가정이야말로 주류 경제학의 모든 이론들이 기대고 있는 핵심적인 가정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경제학사를 살펴보면서 알게 될 것처럼, 이론은 혁명에 직면할 가능성을 항상 갖고 있으며 그것은 과학이 과학으로서의 방법론을 택할 때에 지녀야 할 숙명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어서 주류 경제학의 ‘효용’ 개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탐구함으로써 새로운 경제학의 실마리를 얻어보고자 한다.

2. 쿤의 패러다임 이론 하의 학문의 성숙; 정상과학의 등장

  먼저 쿤의 패러다임 이론, 혹은 과학혁명 이론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겠다. 패러다임 이론이 당시에 큰 충격을 던져준 것은, 하나의 과학이 단일한 발전의 선상에서 지식의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발전해 왔다고 말하던 상식과 달리, 과학의 발전사는 그러한 점진적 축적이 아니라 이전의 과학자 집단에서 통용되던 용어, 방법, 공리 등의 체계가 새로운 체계로 완전히 대체 혹은 개종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발전을 ‘과학혁명’이라고 부르며 용어, 방법, 공리 등의 체계를 ‘패러다임’, 그리고 하나의 패러다임이 거의 모든 당대의 과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질 때 ‘정상과학’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주장이 내포하는 것은, 첫째로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의문이다. 즉 과학은 옳기 때문에 과학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 특히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오류의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그 이전에 그 오류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좀 더 이 주장에서 나아간다면 과학이 당대의 이념에 영향을 받는다거나, 과학 자체가 하나의 이념이라는 주장도 가능해진다.
  둘째로, 과학혁명의 이전과 이후는 과학적 주장 뿐 아니라 과학자들이 쓰는 용어와 방식 등도 바뀐다는 것이다. 가령 뉴턴과 데카르트의 ‘공간’ 개념이 같은 어휘를 씀에도 전자는 ‘힘만이 존재하는 텅 빈 곳’, 후자는 ‘물질의 연장’이라는 의미로 다르게 받아들였던 것이나, ‘열’과 ‘빛’ 개념이 중세, 근대, 아인슈타인 이후에 각각 많은 의미가 변화한 것, 그리고 뉴턴이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미적분학을 만들어 썼던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변화는 용어와 방식조차 단일 선상에서 축적되지 않으며, 이 것 자체가 과학자 집단을 가르는 장벽이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성숙한 정상과학은 가치적 논쟁이 아닌 기존의 용어와 방식을 반복적으로 숙달하도록 새로운 과학자들을 교육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과 달리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기존에 이미 풀린 문제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푸는지를 검증받으며, 그들의 교과서는 저자에 상관없이 비슷한 순서로 비슷한 용어들을 싣고 있다. 그리고 뒤에서 보겠지만, 주류경제학의 교과서도 이런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패러다임 이론에서 정상과학은 과학혁명을 일으키려는 새로운 패러다임과는 다른 활동을 한다. 주류경제학에서도 이러한 정상과학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는데, 위의 교과서의 예 말고도 들어보면, 첫째로 보다 정확한, 다양한 상황 속에서 얻어지는 중요한 사실들의 수집을 들 수 있다. 즉 정상과학에서는 기존의 이론을 검증할 경험 사례들을 수집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공리와 용어 등 가치적 논쟁이 마무리된 정상과학으로서는 이러한 틀로 최대한 넓은 세계를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정상과학 체계는 당연한 지식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들의 이러한 수집은 단일 선상의 과학적 발전으로 여겨지고 언젠가는 세계의 거의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이러한 수집활동은 경제학에서 계량경제학이 맡는 위치를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계량경제학은 현실의 다양한 현상을 경제학 이론이 설명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자료로 만들어주며, 더욱 효율적인 도구를 개발해낸다. 그리고 이러한 계량경제학의 비중은 컴퓨터 기술의 발달과 세계 시장의 통합 등으로 더욱 커지고 있다. 둘째로는 이론을 보다 정교하게 하고 적용 범위를 확장시키는 일이 있는데, 이는 모든 경제학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게임이론에서 보다 현실에 가까운 모형을 만들기 위해 복잡한 게임을 만들어내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다시 정리하면, 현대 경제학은 일종의 패러다임 이론에서의 정상과학으로 수렴하는 현상을 보인다. 한국 대학의 경제학과에서는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경제사 등의 과목을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긴 하지만 그 비중은 흔히 ‘주류경제학’이라고 부르는 신고전학파나 케인즈학파와 그 파생적 학파들보다 훨씬 작다. 주류경제학자들은 계량경제학적 방법을 통해 획득한 자료와 경제학 모형의 이론적 결과를 비교함으로써 타당성을 검증하고 이론을 개량한다. 또 이렇게 검증된 경제학 모형들의 적용 범위를 확장시켜 시장 경제 뿐 아니라 결혼과 자녀 양육 등 다른 사회적 관계를 연구하는 데에도 적용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으며 주류경제학의 이론적 도구로 시작되었던 게임이론은 생물학 등 자연과학에도 적용되고 있다. 또 정상과학이라 볼 수 있는 현대 물리학 등에서와 같이 경제학도 교과서들의 목차가 거의 비슷하며 수리 및 계량적 방법으로 연구 방법이 통합되고 교육 방식이 텍스트의 비판적 읽기가 아닌 이미 풀린 문제들의 응용 중심인 것을 볼 수 있다.

3. 경제학의 여러 패러다임과 그들의 통합

  위에서 보았듯이 주류경제학은 현재 여러 면에서 정상과학의 면모를 보이고 있지만, 이는 여러 패러다임 간의 투쟁에서 이긴 결과이다. 이제는 경제학사를 패러다임 이론의 관점에서 살펴보겠다.
 먼저 고대와 중세의 경제활동에 관한 연구는 그것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중심이었는데, 근대 초기에 들어와 시장 경제가 발달하면서 중상주의와 중농주의, 고전학파가 차례대로 등장하였다. 이 학파들의 근본 전제들을 보면, 중상주의는 개인보다는 교역을 통한 국부 증강에 집중하였으며 각국의 발전 상태에 따라 약간씩 다른 이론들이 등장하였으나 절대군주가 몰락하고 산업화의 영향으로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중농주의와 고전학파에 의해 거부되었다. 프랑스의 중농주의는 합리주의적인 계몽철학의 영향으로 보편적인 자유권을 옹호하고 사회가 자연적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았으며 경제흐름의 정확한 분석을 우선하였다. 이는 고전학파의 기본 가정과 방법론에 영향을 끼쳤으나 농업국인 프랑스보다 공업국인 영국이 세계 경제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던 시기에 영국의 고전학파에 의해 거부되었다. 고전학파는 기본 가정으로서 계몽주의의 자연권적, 이성주의적, 개인주의적 사고방식과 벤담의 ‘인간의 삶의 목표는 최고의 개인적인 행복감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공리주의를 도입하였다.
  산업화 이후에는 고전학파에 대한 비판 이론들이 등장하였는데, 먼저 역사학파는 자유무역으로 영국을 따라잡을 수 없는 독일의 특수성을 반영하여 보호무역을 주장하였으며 고전학파의 근본 전제들에 대항하여 개인주의 대신 국가주의, 보편적인 시장 대신 경제 사회의 변화가 진화론에 입각하여 진행된다는 가정을 도입하였다. 또 맑스주의는 고전학파의 ‘영구적인 자유 시장 경제’의 전제와 ‘노동이 밖으로 드러난 형태인’ 사유재산만을 분석하는 것을 비판하며 헤겔 역사철학의 영향을 받아 사적 유물론과 소외론을 가정하였다. 제도학파는 고전학파의 시장 경제적 물질주의가 통적인 인간성과 공동체적 가치에 적대적이라 비판하였다. 그러나 독일이 패전하고 미국 경제가 세계 경제에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면서 역사학파의 연구가 경제사의 영역으로 제한되는 등 비판 이론들은 비주류 경제학으로 전락한다.
  이 때 이러한 비판 속에서 신고전학파와 뒤이어 케인즈주의가 등장하여 고전학파를 이음으로써 비판 이론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현대 경제학의 주류로 남게 된다. 신고전학파는 고전학파가 상품의 가치를 노동에서 찾은 것을 비판하며 대신에 효용에서 찾아야한다고 가정했는데, 이 때 한계효용의 개념을 도입하는 경제학사의 “한계 혁명”이 일어났고 이를 통해 경제학에 수학적 방법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고전학파는 고전학파와 마찬가지로 벤담의 공리주의를 근본 전제로 하고 있다. 그 뒤에 대공황이 일어나자 신고전학파의 ‘자기 조정적 시장’의 가정이 현실을 잘 설명할 수 없음을 비판하며 케인즈주의가 등장하였는데, 신고전학파와 케인즈주의는 각각 제한된 모형 시장 하에서의 각 주체들의 행동을 연구하는 미시경제이론과 현실의 국가경제를 연구하는 거시경제이론으로서 주류경제학의 주요 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케인즈주의가 신고전학파의 근본 전제들이 미시적 수준에서는 여전히 적합하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듯이, 주류 경제학의 근본 전제, 특히 모든 신고전학파의 미시경제학 교과서 첫 부분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은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마치 뉴튼 물리학의 ‘물질’과 ‘힘’과 같은 존재론적 모형의 역할을 한다. 이것이 경제학을 자연과학처럼 수량화하고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자연 법칙을 발견해 낼 수 있다는 주장의 가장 중요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가 주류 이론의 것으로 남은 이유는 위에서 보듯이 맑스주의에 대한 공산권 몰락과 같이 비판적인 이론들에 대한 강력한 변칙 사례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인구와 자본의 증가로 시장의 규모가 확대되고, 시장 자유의 확대와 국제 교역의 확대로 신고전학파에서 가정하는 경쟁시장 모형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즉 각 주체가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면서 그 특이성(비합리성)이 희석되어 신고전학파의 예측이 더 잘 맞게 되었다. 또 시장에서 거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거래되면서 예측할 수 없는 시장 밖의 효용이 줄어들어 효용이 물질화되고, 따라서 효용을 가격으로 측정하는 신고전학파의 가정이 정당화되었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쿤의 이론이 완벽하게 경제학사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케인즈주의가 신고전학파를 비판하며 등장하였지만 대다수의 대학에서는 그 둘을 모두 가르치며 각 학파는 서로의 이론적 도구를 잘 알고 많이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백년에 가까운 공존은 신고전학파가 주류인 미시경제학에서 다루는 세계가 일정한 제약 하의 가상적 모형인 반면 케인즈주의는 거시경제학이 다루는 국가 경제에서만 시장의 불완전성을 가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즉 근현대 물리학의 각 이론들이 같은 현상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았다면,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은 서로 다른 대상에 관한 학문에 가까우며 특히 미시경제학은 실제 현상을 직접 설명하는 것이 아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를 단순화된 모형에서 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분할 및 공존이 가능하다. 이는 사회과학에서는 관찰대상인 사회 구조가 역사적으로 변할 뿐 아니라 통제된 실험이 불가능하고 매번 다른 결과를 관찰해야 하므로 모든 변수를 고려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시경제학에서도 자유방임적 균형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통화주의가 세력을 얻는 등,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을 같은 전제들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이 간극을 없애는 것은 ‘각각의 합리적인 개인들이 왜 사회적으로는 비효율적인 결과를 나타내는가’에 대한 답을 내놓는 것이며 게임이론과 행동경제학 등에서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 문제이다. ‘합리적인 개인들이 비효율적인, 혹은 그렇게 보이는 사회적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적절한 설명이 등장한다면 주류 경제학은 지속되겠지만, 만약 ‘각각의 합리적인 개인들’의 전제가 거부되는 설명이 등장하고 많은 경제학자를 설득한다면 그것은 경제학 교과서를 처음부터 새로 쓰는 과학혁명이 될 것이다.

4. ‘효용’ 개념 검토

  이제 서두에서 밝혔듯이 주류 경제학의 핵심 가정인 ‘효용’ 개념의 현실적 타당성, 즉 ‘효용’ 개념이 과연 어떤 세계를 만들 수 있으며 그것이 경제학의 본래 목표에 부합하는지를 검토해 보겠다.

    4. 1. ‘행복지수’?

  이 글은 ‘경제적 불평등이 행복의 불평등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언젠가 신문에서는 남태평양의 조그맣고 가난한 섬나라 바누아투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다는 기사가 실렸다.
  경제력과 행복지수가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도 의외일 수 있지만, 놀라운 것은 우리가 흔히 여유로운 삶으로 동경해왔던 서구 선진국의 행복지수도 그리 높지 않고 오히려 한국보다 낮은 수치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조사의 기준에 대해 좀 더 살펴보기 위해 조사단체의 책임자가 쓴 칼럼을 찾아보았다.
  이 칼럼을 요약하면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은 대부분 섬나라들로 나타났는데, 그 이유를 여기서는 고립된 환경 안에서 생존을 위해 자연 친화적이고 서로 선물하며 도와가는 문화를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즉 삶의 만족도, ‘나는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회는 자연을 정복하고 많은 물건을 생산하는 사회가 아니라 자연에서 나는 적은 물건이라도 나누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그래, 행복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재화를 획득하고 소비하는 데에 쏟아붓는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누군가 ‘당신은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나요’라고 물으면 다양한 대답이 나올 수 있지만, 결국에는 ‘더 많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대답으로 모일 것이다. 이 간극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런데 사실 위의 행복지수 조사에 대해서도 여러 비판이 가능한데, 다른 기관의 행복지수 조사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한 국가들을 보면 낮은 경제력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높은 유아사망률과 문맹률, 낮은 여성 인권 등이 관찰된다.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행복한 것인가, 아니면 그런 환경 속에서는 도저히 선진국보다 삶의 질이 높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행복지수가 낮은 선진국 국민은 행복지수가 높은 개발도상국 국민을 원조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탐구하려면 행복지수의 ‘행복’과 위에서 우리가 대답할 때의 ‘행복’의 차이를 탐구해야 한다. 후자의 행복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며 나누기보다 더 많은 것을 갖도록 만드는 것은 그것이 재화로써 측정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화-행복의 구도는 ‘행복’을 ‘효용’이라는 말로 대체하면 그대로 주류경제학의 ‘모든 사람은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와 ‘다양한 상품 묶음은 그것이 한 사람에게 주는 효용 수준에 따라 순서 지을 수 있다’는 기본 가정이 된다(이하 1번 가정과 2번 가정). 따라서 우리의 논의는 경제학적 사회의 ‘행복’을 규정하는 ‘효용’ 개념으로 나아가야 한다.

    4. 2. ‘효용’ 개념 비판

  효용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경제학에서의 효용은 ‘상품묶음이 소비자에게 주는 만족감’이라고 정의된다. 한 개인의 주관적인 만족감을 어떻게든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어야만 그것으로 사회를 설명하려는 경제학이 성립할 수 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위의 2번 가정이다. 즉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더 많고 더 좋은 상품묶음을 획득해야 하고, 이는 교환 시장에서 그가 그 상품묶음에 얼마나 많이 지불할 용의가 있는가로 나타난다. 시장이 자유롭고 정보가 완전히 공개되어 있을 경우, 그 지불할 용의가 모여 상품의 가격을 형성하고, 상품은 그것이 가장 사회적 효용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분배된다. 그것이 경제학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갖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구호를 실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유 재산권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시장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위의 논의가 두 가지 간극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행복’ 개념이 ‘효용’ 개념으로 대체되는 간극이고, 두 번째는 효용이 시장으로 드러날 때의 간극이다. 첫 번째부터 보자. ‘행복’을 ‘상품묶음이 소비자에게 주는 만족감의 총합’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우리가 ‘왜 사는가’의 질문에 대해 계속 질문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은 결국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대답으로 끝날 것이다. 말하자면 ‘행복’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확실히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삶의 이유’와도 비슷한 의미로 대체되어 쓰인다. 반면에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등 기분 좋으면서도 가벼운 경험을 할 때도 ‘행복하다’는 말을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삶의 이유라고 할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여전히 그것도 ‘행복’의 의미 안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행복’이 철저하게 주관적인 감정의 범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가령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의 행복을 생각해 보자. 이렇게 상품화될 수 있는 대상과 관련된 행복이 공리주의가 근거하는 부분인데,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과연 행복이 맛있는 음식으로부터 비롯되었느냐는 점이다. 그 음식은 분명 어떤 이에게는 그닥 행복한 느낌을 일으키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방금 먹은 이는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그 음식이 값어치를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다음 번엔 다른 이들보다 더 높은 가격에 그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간밤에 해골에 담긴 물을 먹은 원효의 이야기는 어떤가. 그가 그 물을 마시며 느낀 행복은 해골에 담긴 물 자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다음날 아침에 느낀 역겨움은, 그 때에도 해골에 담긴 물은 달라진 바가 없었기에, 설명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행복은, 가까이서 찾으면 그가 엄청난 갈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고, 좀 더 멀리로는 그가 걸어야 할 여행길에 대한 두려움 등의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 경제학적 관점으로 이를 설명하면, 목 마른 사람일 수록 물에 더 높은 효용을 매길 수 있으며 그것이 해골 물이라는 정보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생각해보자. 그 사람과 사이가 좋을 때에는 그 물건은 매우 소중한 것이 되며, 만약 그것과 똑같은 물건이 시장에 있다고 해도 그는 자신의 물건에 훨씬 더 큰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과 사이가 나빠지면 그는 주저 없이 그 물건을 팔지도 않고 내버릴 수도 있다. 요컨대 행복을 상품에 국한시켜 생각해본다고 해도, 상품이 행복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단순히 ‘목 마른 자가 물을 더 원한다’는 양적인 필요 뿐 아니라, 그 상품을 만날 때의 상황, 감정, 그것이 그 사람에게 상징하는 관계 등을 포함한다. 물론, 이 글에서 행복이 상품의 소비와 전혀 상관없이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품에 그것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촉매제가 그 스스로는 변하지 않고 적절한 환경에서 화학 반응을 촉발시키는 것처럼, 적절한 상황에서 간접적으로 행복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효용’ 개념의 ‘상품묶음이 주는 만족감’이라는 정의에서 ‘만족감’은 위와 같은 다질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사실 경제학의 목표를 생각하면, ‘만족감’은 그것을 어느 시점에서 상품묶음으로 표현할 수만 있으면 된다는 점에서 더 깊이 파고들어갈 필요가 없으므로 기본적인 공리에 포함되기에 충분한 개념이다. 즉 경제학은 무엇에 대한 욕망이 왜 생겼는지는 관심이 없고, 그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물질세계를 재조정하는 과정에만 관심이 있는 학문이다. 그러나 위의 논의를 다시 생각해보면, 행복을 이루고자 할 때 그것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상품묶음을 획득하는 방법 외에도 지금 소유한 상품 묶음에 대해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도 있다는 말이 된다. 만약 ‘행복’ 중에서도 ‘효용’ 즉 ‘상품묶음의 만족감’에만 집중하여 보아도, 그것이 상품묶음에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이고, 그 의미가 상품 자체의 질이나 양이 아니라 우리가 그 상품을 소비할 때의 다양한 상황과 관계들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그 상품에서 얻을 수 있는 효용은 계속 변화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상품을 획득하여 행복을 얻으려는 시도는 불확실하고 간접적인 시도이다. ‘행복’을 ‘효용’으로 대치하려는 시도는, 행복을 이루는 보다 직접적인 방법을 포기하는 것이다.
  두 번째 간극, 즉 효용이 시장에서 나타날 때의 간극을 보자. 경제학적 관점에서는 자유로운 시장이 효용의 사회적 총합을 극대화하도록 자원을 분배할 수 있다고 한다. 현실의 시장은 경제학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시장이 아니므로, 가상의 자유 시장을 도입하여 생각하자. 이 시장 모형이 가정하는 것은 참가자들의 효용 구조, 즉 어떤 상품묶음을 더 가치 있게 보는지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먼저, 최초에 모든 참가자가 같은 상품 묶음을 갖고 시작한다면, 곧 그들 사이에 거래가 일어나 각자의 효용 구조에 맞는 상품 묶음을 소유하고, 즉 주어진 자원 하에서 사회적 효용을 극대화하고 거래는 줄어들겠지만, 앞서 보았다시피 효용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므로 그에 맞추어 거래가 이어질 것이다. 서로 다른 상품묶음을 갖고 시작한다면 문제는 좀 복잡해진다. 만약 극단적인 가정으로 한 사람이 모든 상품묶음을 독차지하고 시작한다면 어떨까.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어떠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다면, 경제학의 ‘합리적 인간’의 가정에 의해 그 사회는 독점자의 효용만을 극대화하고, 아무리 각자의 효용 구조가 바뀌더라도 독점자의 재화가 쓰레기가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거래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앞서의 평등한 사회 모형에서도 누군가 거래에서 정보를 숨기거나, 자신의 효용 구조에 대해 솔직하지 않거나, 우연적으로 공정한 거래가 발생하지 않았을 때에 그 격차가 누적되어 장기적으로 생길 문제에 가깝기도 하다. 이 때 오히려 갖지 못한 자들은 보통 모든 상품묶음에 대한 욕구가 위의 평등한 상태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데, 거래를 방해할 어떠한 외부 요소가 없음에도 거래가 일어나지 않아 그들의 효용은 전혀 충족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 대다수 사람들의 효용은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효용이 표현될 수단, 즉 교환수단이 없기 때문에 무시된 것이다. 효용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상품묶음이 필요한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상품묶음을 획득하지 못하는 효용은 시장이 반영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이를 현실에서 적용하여 보면, 백반 한 끼에 대한 욕망은 부자보다 거지가 보통 더 많이 느끼겠지만, 그것의 가격이 모두에게 같은 이상 부자와 거지 모두 백반 한 끼 분의 효용을 획득한 것이고, 더 이상 돈이 없는 거지는 그가 가질 수 있는 효용을 극대화한 것이 된다. 즉 자유 시장은 사회적 자원의 총량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적 자원의 분배 상태 하에서 각자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방식인 것으로, 분배에 대해서는 전혀 영향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이 간극의 문제는 소비가 소유로 옮겨 갈 때의 간극의 문제가 된다. 즉 지금까지의 ‘효용’ 개념은 ‘상품묶음이 소비자에게 주는 만족감’으로서 사용되었지만, 이것이 상품묶음을 획득하기 위한 시장에 적용되면 소비적 가치 외에 교환적 가치의 의미도 포함하는 것이다. 시장이 계속 유지된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효용 구조의 변화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물 중 일부를 교환 수단으로서 남겨둘 것이다. 그리고 그 교환적 소유물들은 이제 소비할 때의 다질적인 만족감에서 멀어져 미래의 소비를 위한 가능성의 의미만 남는다. 그리고 시장이 발달하고 거래가 자주 일어날 수록 교환적 소유물들은 편의를 위해 아예 화폐의 형태로 간소화되며, 단지 수의 형태로만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애초에 위에서 ‘행복’ 개념을 우리가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 특히 상품묶음에 대해서는 그것에 부여하는 다양한 의미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즉 이러한 관점에서, 교환적 소유물에 대해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는 기껏해야 미래에 대한 두려움 혹은 미래에 기대되는 소비의 대체물, 즉 소비를 미래로 유예한 결과물일 뿐이므로, 그것을 소유하는 것 자체에서 오는 행복은 실제 재화의 소비가 이루어졌을 때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효용’의 의미가 ‘만족감’이 아닌 ‘상품 묶음의 획득’에 집중되고, 그것이 시장에서 드러날수록, 우리가 논의했던 본래의 주관적인 ‘행복’ 개념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효용 증진을 위해 더 많은 상품묶음을 획득하는 데에 집중할수록 더 많은 재화가 단지 소유되기 위해 소유되며, 그 소유가 적절한 상황에서 소비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미래의 두려움에 대한 안도감 이외의 의미를 찾아낼 수 없다. 각자의 최적의 소비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던 시장은 사실 실현되지 않은 소비, 즉 소유를 위해 존재하는 것에 가까우며 그것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제 이 글에서는 이 두려움을 좀 더 깊이 다루겠다.

    4. 3. 효용과 소유의 발생

  위에서는 시장 모형 안에서 소비가 어떻게 소유가 되는지 보았지만, 주관적인 측면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소유하는가? 재화에는 소비하기 위한 목적도 함께 있으니, 극단적인 소유의 예로 화폐를 들면, 우리는 왜 돈을 버는가? 우리는 어떤 특정한 상품의 소비를 기대하며 돈을 벌 수도 있고, 막연히 미래에 일어날 변화에 대비하여 벌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에도, 그 상품의 소비에서 나타나는 행복은 주관적인 상황과 관계에 의해 정해진다고 하였으므로, 그 돈의 획득이 곧 그 상품의 소비와 같은 행복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모든 소유물을 소비하지 않고 남겨두는 것은, 우리의 삶이 시장 속에서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시장 안에서 당장의 효용 구조 뿐 아니라 미래에 예상되는 자신의 상황과 그에 맞는 효용 구조를 생각하여 거래에 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예상이다. 우리는 보통 과거에 우리가 겪었던 유사한 경험들에 근거하여 연속적으로 미래를 예상한다. 자신의 예상 수명과 주변 사람들의 변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변화 등에 근거하여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과거에 한 번도 겪지 못했거나 생각하기도 힘든 사건들을 삽입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경험들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가깝게는 가족, 멀리는 세계의 경제 및 정치 구조에 영향받으며, 한 편으로는 자신이 그들에게 한 행위로도 이루어진다, 즉 소유는 자신과 연결된 관계들에 영향받는다. 이 때 제기할 수 있는 물음은 과거에 어떤 경험을 했더라도 사람이 위험회피적인 이상 소유를 늘려가는 방향으로 경제 활동을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논의를 뒤집으면, 만약 미지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대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꼭 소유를 위한 소유물을 늘려가는 방식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류학 분야의 유명한 사례인 포틀라치 미주 원주민 부족의 경우, 그들은 주기적으로 이웃을 초청하여 자신의 소유물을 경쟁적으로 선물하고 또 태우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그런 행위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 분쟁을 방지하는 안보 비용으로서 기능했다는 설명이 가능한데, 어쨌든 그런 행사가 자신의 삶 동안 계속될 것이고, 다른 참가자들 또한 자신과 같은 규칙을 따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그는 미래에 대해 대비하기 위해 소유물을 축적하여 남들의 미움을 사는 대신 기꺼이 자신의 소유물을 불태울 것이다. 요컨대 위험회피적인 인간들의 사회에서 반드시 소유의 경쟁이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며, 소유의 경쟁은 시장의 지속을 믿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장이 존재하는 사회들끼리도, 그 시장을 규제하는 사회적 합의의 차이에 따라 경쟁의 정도가 달라진다. 평균 국민 소득이 비슷한 북유럽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개인의 미래에 대한 대비가 정부의 복지 제도에 더욱 의존하는 전자의 경우에 평균 노동시간이 더 적은 등 소유의 경쟁이 덜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시장에서는 빵을 가장 원하는 사람이나 동일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가장 많이 필요한 사람에게 빵이 가장 먼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빵을 아주 조금만 원하거나 심지어 더 이상 빵을 먹을 수 없더라도 빵과 교환할 만한 소유물이 많은 이에게 먼저 빵이 돌아간다. 소유에 따라 소유가 집적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효용이 지불 용의로 나타나고 적정 가격을 형성하므로 충분히 객관화할 수 있다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경제학에서 이 가격구조를 통해 극대화되는 것은 사회 전체의 효용이지 효용의 공정한 정도가 아니며, 위에서도 말했듯이 가격은 소비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작용되므로 그것을 원하지만 가격을 지불할 수 없는 이들의 효용은 계산되지 않는다. 즉 효용이 가격을 통해 객관화된다는 것은 ‘효용’ 개념이 소비의 원칙보다도 먼저 소유의 원칙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며 이는 대상으로부터의 만족감을 더욱 간접적인 경험으로 만든다. 기존의 소비로부터의 만족감도 간접적으로 대상을 통해 기대되는 만족감이었지만 소유로부터의 만족감은 단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의 안도감 정도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소유로부터의 만족감을 ‘효용’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오해를 내포하며, 이 오해는 시장이 낳은 오해이다. 따라서 동일한 역량의 충족을 강조한 센(Amatrya Sen)의 의견 뿐만 아니라 경제학이 그 철학적 기반을 두고 있는 공리주의에서도 역설적으로, 각 이론에서 내세우는 공정한 분배를 이루기 위해서는 시장의 원리에 새로운 조작을 가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밖에 없다. 이는 애초에 그들이 상정한 ‘대상으로부터의 만족감’ 혹은 ‘필요성’ 개념이 소유가 아닌 소비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소유의 욕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시장에서 해결하려 할수록 강하며, 다시 말해 그 해결이 사회적 합의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소유의 욕구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소유한다’라고 말할 때 일어난, ‘행복’이 ‘효용’이 되며 ‘소비’가 ‘소유’가 되는 간극은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 정말 위와 같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첫째로 그가 어떤 대상을 대할 때에 그것으로부터 주관적으로 행복한 느낌을 이끌어 낼 수 없어서, 간접적으로 행복을 느끼기 위해 “행복을 줄 것 같은” 상품을 획득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며, 둘째로 그가 시장 속에 살기 때문이다.

    4. 4. 분배의 원칙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가? 센의 역량(Capability) 개념에 따른 분배에 따르면 사람들의 역량이 비슷한 수준으로 발휘될 수 있을 만큼 사물을 차등 분배해야 한다. 그리고 복지주의는 가장 적게 가진 사람이 가능한 한 가장 많이 가지도록 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시장이 불공평한 분배를 하는 것은 총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이며, 만약 센이나 복지주의를 따라 분배한다면 노동의욕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시장의 분업 구조가 와해된다. 가령 센을 따라 모든 이의 능력을 비슷하게 발휘하도록 분배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각 개인 간의 상대 우열은 사라지고 분업으로부터의 생산 증대 효과도 사라진다. 노동력 또한 철저히 시장 원칙을 따라서 거래되므로 만족감보다는 소유에 의해, 즉 분업의 어떤 자리를 원하는 이보다 그 자리에 더 적합한 이가 그 자리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물질적 빈곤은 값싼 노동력으로서 시장의 중요한 한 축이며, 이를 완전히 없애려고 하는 것은 시장을 완전히 없애려는 것이다. 또한 이 분업의 붕괴는 생산력의 급속한 저하를 낳고 새로운 정치적 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일률적인 물질적 분배가 아니라 이 글의 논지가 계속 그래왔듯이 좀 더 인식론적 범위에서 고찰해야 한다. 국제적 원조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만약 이 글의 주장을 철저히 따른다면, 원조 문제를 말하기 이전에 현대에는 이미 자본과 시장이 확장되어 세계 거의 모든 사회에서 소유의 경쟁을 촉발시켰으며 이들을 통합, 즉 소유의 기준으로 재편성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세계 시장에 편입된 사람들은 세계적 분업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그에 맞는 소유 상태를 지니고 있다, 즉 그들의 소유는 그들의 자연적, 사회적 우연성 자체보다는 그것이 때마침 분업의 연쇄로 이루어진 시장에서 요구되어 적절한 가격에 거래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유 재산이 마치 그들의 신체와도 같은 수준의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으며, 그들의 소유는 시장적 변동의 결과이기에 만약 이 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면, 빈곤한 자들을 원조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이제 떠오르는 의문은 어느 정도까지 원조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 글의 4.2.에 밝힌 ‘행복’의 개념에 따르면 우리의 행복은 본래 매우 주관적인 것이므로 분배의 문제는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 풀어야 하며, 곧 원조 받는 이가 아니라 원조하는 이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즉 각자는 자신의 고유한 가치, 가능한 한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가치를 찾고 그것에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고 소비하며 이를 위해 노동해야 하고, 추가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은 단지 소유의 집적과 물질적 불평등을 만들 뿐이므로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해 효용 수준이 낮다거나, 덜 가졌다거나 하는 비교나, 총생산의 저하에 대한 걱정은 필요하지 않다. 어디까지나 이 체제의 목표는 주관적 행복의 충족이기에 ‘원조’는 원조라기보다 포기의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당연히도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객관성을 전혀 보장할 수 없으므로 제도화할 수 없고, 이는 무정부적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 고유한 가치조차도 보통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고 믿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차선책으로 현실적인 분배 방식을 제시하려 한다. 이 방식에서 목표는 불평등에 대한 불안, 자신이 언제 빈곤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최대한 제거하여 소유의 경쟁을 완화하는 것이다. 이 때 위에서 보았다시피 원조는 시장 체제에서 자신의 소유가 사회로부터 오는 데에 대한 도덕적 의무이지만,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많으므로 국내의 경우에는 조세 제도로 보완할 수 있다. 그러나 원조를 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받는 이들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 위에서 보았다시피 소유의 경쟁은 시장 체제에 편입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문제이며, 물질적 빈곤보다도 그것에 포함되기를 더 꺼리는 이들에게 물질적 원조는 정신적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조는 물질적 불평등의 제거와 함께 역설적이게도 소비되지 않는 소유물을 축적하는 사람들의 수를 늘림으로써 그들을 시장 체제로 편입시킨다는 양면성이 있음이 드러난다. 즉 위의 포틀라치의 예를 들면 그들을 원조하는 것은 곧 그들의 전통적 사회 안전망을 파괴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의무적 재분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신뢰의 구축이다. 의무적 재분배는 미래에 대한 불안의 해결을 위해 사유 재산의 축적 대신 사회적 저축을 택한 것이고, 이는 혹시 자신이 빈곤해지더라도 사회적 저축을 통해 이를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 하에서 지속 가능하다. 그리고 이 믿음 하에서는 미래의 생존을 위해 소유를 극단적으로 경쟁할 필요가 없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 즉 사회적 저축량만 채운다면 자신의 나머지 시간을 위에서 말한 고유한 가치를 위해 투입할 수 있다. 
  위의 모형은 마치 잘 유지되는 복지국가의 그것과 같다. 그러나 이 사회적 저축 개념을 국제 원조의 문제에 적용하는 데에 등장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이를 통제할 초월적 권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국제적 신뢰를 지속적으로 담보할 수 없으므로 원조는 의무라고 받아들여지기가 불가능하다. 이를 어기는 국가에 대해 타국들이 시장 제재 등으로 벌을 줄 수 있도록 문서화한다고 하면, 원조 받은 정도가 클 수록 보통 해외 의존도가 크므로 시장 제재가 주는 타격이 큰 효과도 있지만, 경제 성장을 한 새로운 강국이 자국을 중심으로 구조를 재편할 수 있는 위험성과 함께, 원조를 받은 세대의 이후 세대에게 그것에 대한 책임을 묻기가 힘들다는 문제도 있다. 또한 이를 감독할 초월적 권력 기구를 어떻게든 만든다면 그것은 전 세계가 단일한 시장 구조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선포이고 위에서 말한 시장 밖의 다양성은 고사될 위험이 있다. 안타깝게도 한 국가 내의 역사를 보아도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기까지는 집단 간에 투쟁과 합의를 반복하는 긴 시간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하물며 국제적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 벌어질 수도 있는 비극들은, 제국주의적 침략이 중지되고 국제 기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세계대전 이후라는 점에서 보듯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국제적 빈곤을 제도적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먼저 국제적 신뢰 구축 방안에 대한 논의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집단과 국가의 윤리를 말하기 전에 더욱 현실적이고 시급한 것은 개인의 윤리에 관한 것이다. 이 글에 따라 가장 바람직한 것은 주관적 행복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겠지만, 우리가 국제 사회에 대한 ‘의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한 사회가 필수소비재나 그것에 맞먹는 교환가치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정도까지 원조하는 것이다. 이는 그 사회가 이미 세계 시장 체제에 편입되었음과, 한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가 그가 속한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영향받는다고 할 때(가령 브라질에서는 축구 선수를 목표로 하는 아이들이 많은 것), 그 사회가 스스로 어느 정도 분절화된 분업 체계를 이루고 그것에 걸맞는 다양한 역량을 가진 개인들을 독려하며, 구성원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 이상의 생산량을 유지함으로써 그 초과량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논쟁이 가능해지는 수준을 말한다. 이러한 논쟁이 벌어지면 대중이 정치를 자신들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롤즈가 말한 ‘질서정연한 사회’에 가까운 사회가 등장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글은 롤즈의 분배 원칙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이 때 더욱 원조를 하는 것은 그 사회의 경제 체제가 자신들의 생산보다는 원조에 더 의존하게 하여 분업 구조를 왜곡하고 국내 생산자와 노동자들이 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며 정치는 대중이 아닌 외국에만 초점을 맞춰 이뤄지고 곧 독재와 정치적 불안으로 이어진다. 이는 총체적인 문화와 국가적 정체성의 붕괴이고, 근현대 한국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4. 5. ‘효용’과 주류 경제학의 대안

  그렇다면 이제는 어떤 경제학을 연구해야 하는가? ‘효용’ 개념은 위에서 보다시피 '미래 소비‘라는 개념을 내포하면서도 이를 은폐함으로써 ’행복‘의 개념에서 멀어져 ’미래의 위험에 대한 공포‘로 변질되었으며, 따라서 ’효용‘ 개념 위에 서 있는 경제학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구호마저도 만족시키지 않고 ’최대 다수의 공포에 대한 효과적 통제 기제‘라는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경제학이 잘못 세워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만큼 미래에 대한 공포를 막연한 행복보다 더욱 다급하게 느끼고 있으므로 그러한 경제학을 요청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공정하고 효율적인 분배 체계를 세울 수만 있다면 누군가를 착취해야 잉여 생산물을 축적하여 사회적 안정을 꾀할 수 있는 경제학의 기제를 대체할 수 있겠지만 이는 위에서 보았다시피 구성원들 간의 신뢰가 전제되어야 하는 아주 달성되기 힘든 균형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존의 균형을 극복하고 새로운 경제학을 제시하려는 사람은 이러한 ‘신뢰의 구축’ 문제에 먼저 몰두해야 할 것이다. 즉 구체적 재화를 놓고 벌이는 게임이론이 아니라, 총체적 사회에서 장기적인 안전을 어떻게 개인들에게 현실적 보상으로 여기도록 할 것인가, 그리고 그 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공포와 안정에 대한 욕망은 어떤 힘으로부터 비롯되며 어떤 행위로 드러나는가를 연구하는 정치학과 심리학으로서의 경제학을 도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류 경제학의 핵을 거부하고 새로운 분배의 균형과 법칙을 찾아낼 수 있는 새로운 경제학이다.

<참고문헌>

토마스 S. 쿤, 김명자 역(1999): 『과학혁명의 구조』, 서울, 까치 
최상훈(2007):『경제학사』, 서울, 한국문화사
김대래 외 2명(2004): 『경제사상사』, 서울, 신지서원
Amartya Sen(1979): “Equility of What?",      Tanner lecture on Human Values, Delivered at Stanford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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