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연(Différance)과 차이(Différence)

  이 글은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차연(Différance)」,『해체』, 데리다 저, 김보현 편역, 문예, 1996. 이하 「차연」)이라는 글에 나타난 ‘차연’ 개념을 분석하고 그것이 기존의 형이상학을 어떻게 해체하는지 고찰한다.
  먼저 데리다는 그의 ‘차연’ 개념을 ‘차이(Différence)’에는 없는 ‘a'를 강조하는 것으로 설명을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차연은 (불어로) 차이와 똑같이 발음되기 때문에 눈으로는 식별되지만 자신의 소리는 없는, 그래서 a를 e에 대한 실수로 간주하고 무심히 지나가려 해도, 어쩔 수 없이 a를 지닌 차연에 의해 이미 사전에 기술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이 차연 속에 갇혀 있다”(「차연」p 119). 이 ’a‘는 “소리 없는 표시로, 무언의 묘비, 심지어 대문자 A로 활자화될 때, 이 모양이 피라미드와 닮았을 뿐만 아니라...(중략)...차연, 즉 생을 죽음과 맞바꾸는 경제성, 다시 말해 차연에 의해 생산되는 고유한 것으로서의 무덤, 대대로 물려받은 죽음의 은식처, 이러한 장소를 묘사할 수 있다고 기대해보자”(「차연」p 120). 
  이 ‘a'에 관한 문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데리다가 기존의 음성중심주의적 형이상학을 해체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라는 것이다. 음성적으로는 구분할 수 없지만, 그 소리 없는 차이는 죽음의 집, 즉 묘지와 같으며, 이는 “순수하고 전적으로 음성에 준한 문자는 존재하지 않”음을 알리는 장치이다(「차연」p 121). 또한 위에서 말한 ’경제성‘은 그리스 어에서 집(oikos)과 무덤(oikesis)와 동족어로서, 전통적인 철학의 방식인 지식 체계의 집짓기, 지식의 영원한 축적, 신적인 존재자로 존재를 인식하기(존재신학)에 대한 해체로서의 단어이다. 즉 “e와 a로서 표시되는 차이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철학의 기저가 되는 이원 구조, 즉 감각과 이상이라는 대립구조를 저항하는 체계를 암시한다”(「차연」p 122). 즉 기존의 형이상학이 음성중심주의적 관점, 즉 영혼의 목소리로서 나타나는 자신, 영원한 존재의 일시적 현전으로서의 존재자를 사유하였다고 할 때, 여기서의 소리 없는 ’a'와 ‘e'의 차이는 현전하지 않음으로서 이원 구조를 저항하는 차연을 나타낸다. 따라서 현전하는 존재자에 대한 음성언어를 벗어나는 차연은 “말도 아니고 개념도 아니다”(「차연」p 126).
  차이(Différence)와 차연(Différance)의 차이는 어원적으로도 분석할 수 있다. différer는 본래 ‘연기하다’와 ‘다르다’의 뜻을 가졌는데, “지금 différence는 (‘연기하다’에서 파생된) 시간화나 논쟁에 있어서의 상이한 의견이나 근거를 지칭하지 못한다”(「차연」p 127). 이에 따라 ‘시간화’의 뜻을 갖는 차연은, “기호는 부재중에 있는 현존을 표상”하며, “현재가 현전할 수 없을 때 기호를 만든다”는 점에서 “기호는 연기된 존재”라는 것과 연결된다(「차연」p 129). 즉 소쉬르의 언어 체계는 차이성과 자의성의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두 특성은 문자를 음성 이미지(기의)에 대해 열등한 것으로 만들었지만, 그리고 “오로지 차이만이 있”음으로서 “체계와 통계로 분류하여 언어 목록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지만, 그 차이 자체가 연기된 효과라는 것이다. 즉 ‘차이’라는 말은 오직 ‘다르다’의 의미만을 가짐으로써 “전통의 형이상학적 지평에서 벗어날 수 없다”(「차연」p 136). 반면에 ‘차연’은, 전통적 형이상학적 지평, 즉 음성중심주의로서는 ‘차이’와 구별하기 힘들겠지만(마치 'a'와 ‘e'를 음성적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이분법적 구조에서 사유될 수 없는 “말도 아니고 개념도 아닌” 무엇, 존재를 공간적으로 유보시켜 현전되기 이전의 무엇을 가리키는 기표가 된다. 따라서 차연은 음성중심주의에서의 ’기표의 기원으로서의 기의‘를 해체, 즉 텍스트의 바깥은 없음을 선포한다. 지식의 불멸하는 기원을 찾으려던 형이상학은 이 지점에서 그 경계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여때까지 ‘의식’이라 불러왔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기표를 말함으로써 기의에 다가갈 수 있다고 여겼던 그것은, 텍스트가 기표들 간의 차이가 되고 그 차이는 또한 차연이 생성하므로, 이제 “형이상학적 언어 속에 갇혀 있는 사유 요소”다(「차연」p 141). 그렇다면 “무엇이 차연인가”? 데리다는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차연은 온갖 이름이 주어지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이름이라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으며, “특히 의식으로서 현전하는 존재자가 결국 지연된다고 결론 내릴 것이다”라고 말한다(「차연」p 138). 우리가 이미 음성중심주의적 형이상학과 기의에서 벗어난 차연을 사유한다면, 차연은 기표의 차이를 생성하는 것이고, 우리가 말하는 모든 이름들은 지연된 존재이므로 우리는 말하고 있는 우리의 의식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차연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차연은 현전자가 아니다”(「차연」p 149).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더의 단편글」을 인용하면서,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망각, 곧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의 망각이 존재의 역사의 시작이자 존재와 현존의 혼동이었으며, 신적인 존재자가 사유될 때, 즉 “현전이 현전자로 나타나 존재자의 위치에서 최고의 현전자가 될 때”, 그 차이의 흔적은 삭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흔적은 “현존이 아니라, 현존을 밀어내고 전위시키고 조회하는 현존의 위장” 즉 기표이기에, “이러한 흔적으로 인한 현존의 삭제는 구조에 속하는 것이다”(「차연」pp 152-153).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이러한 구조 상의 차이는 흔적과 흔적의 흔적, “흔적이 지워진 흔적”만을 나타낼 수 밖에 없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이름은 (기의를 기표로 이른다는 점에서) 이름으로서 형이상학적이며”, ‘차연’ 또한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이름이다”(「차연」p 157). 그러나 데리다는 차연이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로도 규정할 수 없다고 하며, “‘차연을 위한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액면 그대로 평범하게 읽혀져야 한다”고 말한다. 즉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라고 말하는 순간도 여전히 흔적이 지워진 흔적, 존재자와 존재의 현존적 분리를 가정할 수 밖에 없으며 이는 언어를 통해 현존이 삽입됨으로써 지연되었기에 차연 그 자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차연」pp 157-158). 그의 글을 끝맺는 말, 그리고 하이데거가 한 말인 “‘존재는/항상 그리고 어디서나/모든 언어를/통해/말하고 있다’”는, 현존하기 이전의 존재, 존재자로서 사유되기 이전의 존재는 하나의 이름, 영혼의 목소리로는 파악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2. 이분법의 형이상학과 그 이후

  데리다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형이상학은 다양한 존재자들에 내재한 보편적 진리를 찾는 것, 감각 너머 이성으로서만 찾을 수 있는 빛을 발견하는 것, 존재자 너머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를 향한 이론적 통합 시도들은 ‘존재자와 존재자를 묶는, 공통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존재자를 찾을 것’이라는 규범을 따른다(또는 ‘서로 다른 존재자들의 공통적 기원을 찾을 것’). 이 규범을 분석하면 ‘존재자와 존재자가 아닌 것의 구분’이 그 통합의 전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의 최종목표는 이분법 위의 이분법을 계속 추적하는 과정 끝에 더 이상 그것이 아닌 것을 찾을 수 없는 무엇인가에 다다르는 것으로, 이 무엇은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여러 신적인 존재자의 이름으로 불렸다. 즉 이 통합 과정은 논리적이고 언어적이어야 하고 곧 새로운 이분법으로의 지속적 이행을 의미한다. 이 이분법의 이행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형이상학적 어휘들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이 정말 존재로 다가가는 과정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대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데리다의 주장에 따라 언어 구조 상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하나의 이분법 구도로 존재자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이다(1)'와 '아니다(0)'일 뿐이며, 이 이외의 서술은 형이상학의 논리적 방법론에 어긋난다. 그리고 전통적 형이상학이 이분법의 연쇄를 통해 세계를 세밀하게 범주화하고 이름붙이는 것은, 이러한 '이다'와 '아니다'가 다양한 축선에서 연쇄적으로 측정되는, 수학에서의 미분을 연상시키는 그러한 근사적 작업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여기서 측정되는 ‘존재자’라고 불리우는 것은 사실 현존재이며 유보된 것으로서, 우리가 이분법의 축선을 더할 수록 존재자가 존재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현존재와 충돌하며 차이의 흔적, 형이상학적 이름을 생산해내는 것일 뿐이므로, 데리다의 관점에서는 근사적 작업이 되지도 못하고 오히려 망각의 작업에 가까운 것이다. 이는 아무리 많은 ‘차이’,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와 같은 엄청난 규모의 ‘차이’를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여전히 유보된 것이며 기표의 기표이기에 텍스트를 벗어날 수 없다. 데리다는 이러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든 이름들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차연’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분법적 통합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는 없는가? 데리다의 「차연」에서는 “존재의 이름이라 해도 특이한 이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순수하게 모태적 언어와 최초의 사유가 존재했던 낙원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믿는 신화(예를 들어 성서의 선악과 이야기)를 배제한 상태에서,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 사실들을 긍정적으로 맞이해야 한다”면서, “존재 고유 속성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언어는 고유 말을 찾아야”한다고 서술한다. 이는 필자의 생각에는 (현존자들을 선악으로 가르게 된 이후의) 이분법적 언어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며, 이분법을 떠나는 것은 존재자의 해체로부터 시작된다. 이전부터 당연하게 같은 것 혹은 다른 것이라 여겨져 왔던 것을 의심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스스로의 의식을 해체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분법적 통합 방식을 통해 존재자의 배후에 있는 “거대한” 존재를 찾으려 하는 공간적/거시적 형이상학과는 다른, 스스로 ‘어떤 계기로 그러한 이분법을 생각해 냈는가’, ‘왜 그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였는가’ 등으로 습관적인 이분법적 사고를 순간적으로 성찰하고 존재자를 변화하는 것으로 해체한다는 점에서 시간적/미시적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 계속 밀고 나가면, 이분법의 틀에서 고정되어 있던 각 존재자들, 즉 이름들이 지속적으로 해체되면서, 하나였던 것이 결국 둘이고 둘이었던 것도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이것이 로고스-음성에 의지하지 않는 새로운 사유 방식이며, 형이상학의 원죄적 테두리 너머를 사유하는 방식이다. 앞서 데리다와 하이데거도 말했듯이, “존재는 항상 어디서나 모든 이름을 통해 말하고 있”으며, 우리가 할 일은 존재자에 거창하게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담담하게 언제 어디서나 말해지는 이름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선악과 이전에 대한 “노스탤지어” 또한 또 하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SP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