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개념2017. 9. 15. 10:28

인과의 바깥은 불가능하다. 체험적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논리적으로도 그러하다. 인과의 예외가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가령 모두에게 악을 끼치고도 좋은 결과를 얻는 방식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그러한 불균형은 결국 그 방식으로 모든 결과가 집중되어 체계는 무너질 것이고, 질서는 없어지며 혼돈만이 채울 것이다. 완전하고 영원한 체계는 오직 빈틈없는 인과만이 보장한다. 이 이야기는, 눈에 보이는 언행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 속 생각까지도 뚜렷이 선악이 있으며, 선업은 선한 결과를, 악업은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다. 현재에 마음의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우리 마음과 이 세계가 마치 영사기에 비춰진 필름과도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사기의 빛은 존재감 자체이며, 그 영사기의 빛은 바깥 세계의 가장 끝부터 우리 마음의 가장 은밀한 생각까지 모두 뿌리를 둔 자리이자 그것들을 지켜보는 눈이다. 다시 한번, 인과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빠르게 승복하고, 그저 지금 뿌려야 할 씨앗을 뿌리고 만족할 뿐이다. 결과는 그에 따라 알아서 오리라 믿으며. 그러면 오히려 우리가 지금껏 마음 졸이고 걱정했던 일들이 별것 아닌 일처럼 느껴지며 마음의 짐을 덜게 된다. 인과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길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 자아의 모든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성격, 지적 능력까지)은 이미 인과에 의해 정해져있다. 사실 우리 인생의 큰 줄기는 우리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그 자유의지가 유일하게 통하는 영역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영역, 현재이기 때문이다. 현재, 지금 바로, 그 때 그 때마다 신과 양심에 따를지 말지, 선업을 할지 악업을 할지, 어떤 씨앗을 뿌릴지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다. 그리고 그에 따라 결과를 주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이고. 신과 함께 협동 작업을 하며 점점 나아질지, 도리에 사사건건 어긋나며 스스로를 망칠지는, 정답은 정해져있지만 택할 자유는 있는 그런 문제다. 현재에 진실로 충실하면, 우리는 언제나 점점 나아질 수 있다.


+ 우리가 인과의 빈틈이 있으리라고 막연히 기대하며 착각하는 이유, 신이 없다거나 신은 사람에게 무관심하다고 말하곤 하는 이유는 첫째, 요행을 바라는 우리의 어리석은 욕심 때문이며, 둘째, 우리의 사고능력과 개념과 경험과 지식은 인과를 그대로 분석하기에 너무나 부족한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무지가 악이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진실로 알면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이 뜻이다.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알면 불 속에 절대로 손을 넣지 않으며, 물건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절대 절벽 너머로 걷지 않듯이, 인과를 진실로 조금이라도 안다면 악업을 쉽게 저지르지는 못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해야 비로소 진정한 앎의 시작이다. 

또한 신을 어떤 제한된 인격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유치한 개념이지만, 만물에 일정한 근원법칙이 있음을 본능적으로든 개념적으로든 인정하면서 그 법칙을 신으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는 건 웃기는 일이다. 신이 제한된 인격을 벗었기에 오히려 만물과 모든 마음 속에 자리하고 모두에게 평등한 관심을 주면서 그것을 하나로 꿸 수 있는 것이다. 매일 밖에서든 안에서든 일정한 질서를 보며 질서 속에 살아가면서 마치 신이 없다거나 자신을 버렸다는 듯 사는 건 무지일 뿐이다.   

Posted by SP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