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夢生, 夢生夢.
삶은 삶을 꿈꾸고, 꿈은 꿈을 낳는다. 또는 생생한 꿈은 삶이고, 꿈 속의 삶은 꿈이다. 삶과 꿈은 어찌보면 다르지 않다.
꿈에 나온 나와 남과 시간과 공간과 생각과 느낌이 깨고 보면 실은 모두 하나에서 나오듯이, 현실도 그러함을 깨달으면, 나와 남이 다르지 않아 그 '현실'이라는 꿈을 꾸는 하나의 참된 "나"를 위한 행동이 곧 '현실'이라는 꿈 속의 나와 남을 모두 위하는 일이 되며, 다시 말해 세계가 하나의 참된 "나"가 되므로 자각몽을 경영하듯 세계를 경영하는 마음으로 살게 된다(또는, 살아야 한다). 또는, 지금의 자아가 "현상 세계"라는 온라인 게임에서 신神이 선택한 하나의 캐릭터이며, 다른 자아나 생명들도 역시 그 신神이 동시에 굴리는 캐릭터들이라는 느낌으로 바라보아 보자(1인칭 게임에서의 캐릭터보다는 3인칭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의 하나의 유닛이, 지금 "나"라고 흔히 믿는 자아라고 비유하는 편이 낫겠다).
생각과 느낌과 자아 관념을 보통 '나'라고 생각하며 몸을 움직이는 것은 그 '나'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몸이 움직이는 것은 마치 물이 저절로 흐르고 비가 되어 내리듯 형이상의 리理와 형이하의 법法에 따라 물질과 세포들이 움직일 따름이며, 생각과 느낌 또한 욕망의 관성 법칙에 따라 쉴새없이 일어나는 일종의 파도와 같은 현상이고, 그런 것들을 '나'라는 관념으로 묶어 욕망의 관성에 이끌려 다니면서 그것을 '나' 스스로 자유롭게 의지한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생명이 그리 진화하도록 한 리와 법의 ("비생명적인"; 뒤에서 말할 또다른 결과는 반대로 "생명적"이다) 결과물이다. 물질이 고도로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일시적으로 외부와 뚜렷이 경계지어져 안으로 작은 세계를 만들어내는 생명체의 의의는, 그렇게 다른 개별 입자들과 생명 없는 물질들처럼 관성에 종속되어 끌려다니는 데에 있지 않다. 생명체가 그의 개별성과 물질성 안에서 자유를 찾으려는 것은 헛된 시도일 뿐이며, 그의 존재 의의 즉 자유는 진정으로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존재, 즉 나뉘어지고 한계지어지지 않은 존재인 유일자, 세계를 만들고 경영하는 그 자리, 태극 혹은 불성 혹은 (인격화되지 않은) 신성, "변화 자체"의 입장에 근접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 생명체는 리와 법에 따라 세계를 닮은 모습으로 작게 모방된 소우주로서, 밖에서 찾을 필요 없이 그 안에서 얼마든지 대우주를 운영하는 그 자리의 닮은 꼴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는 것이 생명체, 특히 지성을 지닌 생명체가 유일하게 생명체답게 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아는 좋거나 나쁜 게 아니라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듯 생명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리에 어긋난 욕망을 위해 쓰는가, 아니면 리에 맞는 욕망 즉 자유를 위해 쓰는가이며, 형이상의 리가 형이하의 세계에 나타나도록 하는 중개자로서 욕망과 욕망을 추구하는 자아의 힘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돈오頓悟로 형이상의 리를 본 이후에도 점수漸修로서 리에 맞춰 자아를 갈고 닦아야 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우주의 신이 되는 게 아니라 소우주 즉 자아와 몸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우주의 신은 정의상 이미 항상 최선이어서 거기에 무엇을 더하려는 생각은 틀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며,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을 꿈꾸는 것은 자아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버리겠다고 욕망과 싸우는 사람은 욕망의 노예만큼이나 어리석다.)
달리 말하면, 대우주는 자기닮음꼴 구조이며 소우주는 대우주를 닮은 한 부분인데, 생명 특히 사람은 그 구조가 복잡한 만큼 자기닮음꼴 구조의 변화를 일으키는 "임계점", "지도리(樞)"로 작용한다. 대우주가 몸이라면, 본래의 사람은 대우주의 정수(DNA에 비유할 만 하다)를 그대로 가진 원형으로서 아직 분화되지 않은 줄기세포에 가까우며, 그 줄기세포가 대우주의 흐름에 사사건건 역행하여 암세포가 되어 대우주를 망치다가 그 댓가를 치르건, 반대로 면역세포나 뇌세포 등이 되어 대우주의 뜻을 행하건, 그것은 줄기세포가 행하는 업業으로, 대우주를 닮아 일시적으로 고도로 유기적이며 불연속적인 조직이자 임계점이 된 생명과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다. 성인聖人이 아닌 대다수의 사람에게 각자 있는 아집과 그로 인한 죄와 고통은 줄기세포가 이미 악업惡業으로 분화되어 대우주에 해를 끼치는 세포가 되어간다는 뜻이나, 사람이 아집 대신 자신 안의 대우주의 뜻, 神, 理를 알아차려 그에 따르려 계속 노력하면, 분화는 다시 역분화를 일으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본연의 줄기세포 상태가 될 수도 있으며, 비로소 주변의 세포들에게도 다시 역분화할 수 있는 길을 몸소 보임으로써 알려줄 수 있다. 이것이 옛 성현들이 이야기한, 사람이 껍데기만 사람이 아니라 참된 사람이 되기 위해 걸어야 할 외길, 道다. 불가佛家식으로 말하면, 억겁의 윤회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는 매우 귀한 기회이니, 사람일 때 열심히 선업善業을 쌓고 공부하자.
생명과 인간이 대우주의 임계점이라는 것은, 실제로 자기닮음꼴 구조인 프랙탈에서 무한한 하위구조의 갈라짐이 그 구조의 차원을 높이듯, 생명과 인간을 통해 대우주의 저차원(물질)과 고차원(형이상적 정신)이 이어짐을 뜻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프랙탈 모형도 우주에 대한 비유에 불과하고 놓아버려야 할 象이지만, 그 비유를 밀고 나가보면 인간이 대우주를 그대로 닮아 그 변화를 그대로 자신의 변화로 할 수록, 그리고 그러기 위해 대우주의 고차원적인 단일한 신성에 머무를 수록, 그는 고차원과 저차원을 제대로 잇는 진정한 임계점으로서 자유로울 것이다. 만물에 대한 지식을 모두 아는 박학다식한 초인보다는, 불학무식하더라도 항상 깨어있는 무지랭이가 훨씬 낫다.
身念魂衣, 時空靈宇, 不知服宙, 魂歸由靈, 靈去卽尸, 靈卽永零.
몸과 생각과 느낌은 혼의 옷이고, 시간과 공간은 영의 집이니, 옷과 집을 모르면, 혼은 영으로 돌아가 그로부터 말미암는다. 영(자아가 아닌 '참나', 내 안의 神, 빈 마음, 空, 하느님, 성령)이 떠난 사람은 곧 시체나 다름없으니(울고 웃고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그것은 다른 시체로 연명하는 시체며 얼마 안가 진짜 시체가 될 운명이다), 영은 곧 영원한 0, 만물이 그로부터 나온 구별없는 상태이다.
이름도 모르고, 몸과 감각도 모르고, 생각과 감정도 모르고, 시간과 장소도 모르고, 아무 것도 분별하지 못하겠다는 마음으로, '생각을 놓아버려야지'라거나 '아, 하나구나' 하는 생각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잠시만 있어보자. 떠오르는 생각과 감각과 감정들을 없애려 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이것은 불교식으로 관觀하는 법, 자아를 벗고 참나를 바라보는 법 중 하나다.
이렇게 참나, 내 안의 신을 만나면, 그 신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본래 하나이기에, 진정으로 남과 하나가 되며 시작과 끝이 무의미해진다("알파요 오메가이다", "너희는 지상의 일을 걱정하지 마라"). 모든 일을 그 불성, 신성, 도리, 참나, 하느님에 맡기고 안식하면, 망상과 걱정과 기대와 아집이 없어지며(없어져야 하며),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충실히 존재한다(존재해야 한다). 겉으로 계율과 도덕을 지키며 금욕하는 것보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이의 마음으로 신에게 모든 일을 맡기는 편이 훨씬 더 위대하다.
감각, 생각, 느낌과 그로 인해 인식되는 세계는, 마치 태극이 음양으로 갈라지듯, 인식되는 대상과 인식하는 자아를 인식과 동시에 만들어내고, 또 사라지게 한다. 그렇게 물결같은 찰나의 象에 현혹되지 말고, 그 음양, 인식, 주체와 객체를 가능케 하는 바탕에 집중하라.
奉靈, 靜魂, 養魄, 正肉, 修魂肉化靈魄, 精氣神合一.
영(참나, 성령)을 받들고, 혼(자아)을 깨끗이 하며, 백(몸의 기氣, 혹은 기로 이루어진 몸)을 기르고, 육(몸, 몸가짐)을 바르게 하자. 즉 혼과 육으로 이루어진 '작은 나'를 닦아, 하나의 영과 하나의 기운으로서의 '큰 나'로 다가가자. 도가道家식으로 달리 말하면 정精, 즉 작게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크게는 물질과 인간의 현상계에서 나와 남이 아닌 마음으로 사랑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기氣, 즉 하단전과 상단전의 기를 이어 모으며, 신神, 즉 마음을 오직 하나의 마음(神)으로 모은다. 神을 제대로 찾아 그것을 따르며, 精을 神에 따라 목숨같이 보존하고, 氣로 精을 氣化하여 축적하며, 神을 다시 氣로 받쳐 항상 깨어있도록 한다. 이것이 여러 경전에서 말한 유일한 (시공간에 한정된 작은 나의 틀에서 벗어나 남과 내가 하나된다는 의미에서 물질적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생의 길이며, 윤회를 벗는 길이고, 천국이나 극락으로 가는 길이다(또는 작게는 지금 여기, 크게는 장차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드는 길이다).
기氣에 대해 말해보면, 물질 즉 입자는 근본이 될 수 없는데, 입자는 그 안과 밖의 나뉨이 핵심이며, 입자가 근본이라면 입자 사이의 나뉨과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입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원리로 이 다양한 세계와 시간과 공간을 설명하려면 필연적으로 파동이 근본적인 설명방식이 되는데, 물론 이 때의 파동도 형이상적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편의상의 개념일 뿐이지만, 어쨌든 끊어짐 없는 파동만이 하나의 원리와 하나의 세계에 대한 상을 줄 수 있으며, 입자는 이러한 관점에서는 파동의 잔상, 관찰자의 인식상 한계의 결과나 자아의 결과로서 설명된다. 이 때 동양에서는 태극으로 설명되는 이 (어떤 우주를 만들더라도 여전히 그럴 것이라는 의미에서) 필연적이고 형이상적인 순환과 파동은, 그것이 형이상적인 것이기에 형이하적 세계에 적용되어 물질로 나타나려면 그 파동을 매개할 매질이라 할 만한 무엇을 필요로 하는데, 그 변화 자체를 담지할 에너지, 형이상과 형이하에 걸쳐 있어 입자화되기 직전의 변화,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에 근접할 수록, 입자의 경계가 무너지며 통으로 된 변화로 인식될 수록 접근할 수 있는 그런 힘을, 동양에서는 기氣라 부른 것 같다.
心, 氣, 理, 行.
(불가처럼) 내관반조內觀反照하여 마음의 본성을 바라보고, (도가처럼) 기운을 기르며, (유가처럼) 세상과 변화의 결을 연구하여 그대로 덕을 행하자.
리理, 이데아, 변화의 결은 눈송이와 곰팡이와 인간이 모두 혼돈이 아닌 일정한 모양으로 발생하여 변화하는 데에서 알 수 있는, 유전자들을 가능케 하는 유전자, 법칙들을 가능케 하는 법칙, 수학을 가능케 하는 수학인 형이상의 원리다. 이 형이상의 원리는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언어나 기호로 개념화할 수 없으며 개념화하는 순간 그것은 변화 자체로부터 분리되어 박제된 욕망의 산물이 된다. 논리학을 기반으로 한 철학은 바로 이 근원적 원리에 논리로써 다다를 수 없음을 논리적 모순으로 밝히는 데에 역설적인 의의가 있으며, 사실 진정한 철학은 그 이후부터 생각과 느낌과 자아를 내려놓음으로써 시작한다고 봄이 옳다. 그 후에야 다시 논리학을 통한 철학과 과학으로서 원리를 현실에 적용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옳은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형이상의 리와 형이하 혹은 과학의 법을 매우 거칠게 비유하면, 중력법칙 등이 형이하의 법이라면, 지금의 세계(우주)가 아닌 다른 어떠한 세계를 만드느냐에 따라 다른 중력상수나 다른 공식을 따르는 세계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다양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닌 세계라면, 하나로부터 나와 다양함을 펼치는 세계라면, 그 어떤 형태의 세계라도 두 존재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경향이 없이 발산의 경향만 있는 우주는 성립불가하며, 반대로 수렴의 경향만 있는 우주 또한 불가하다. 또한 이러한 수렴-발산의 대립쌍은 물리 법칙 뿐 아니라 그것의 유기체적 모방인 생명체 간의 관계에서도 적용되어야 하는데, 물질이 그러한 고도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나타내며 조직되기 위해서는 수렴과 발산의 정교한 균형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렴-발산의 대립쌍은 즉 모든 층위의 "존재"의 필연적 조건이며, 따라서 법칙들의 법칙, 형이상의 리를 음양의 이분법과 그 섞임으로 기호화하는 것은, 물론 형이상은 기호화할 수 없기에 그것 또한 거친 비유 혹은 영감을 일으킬 계기일 뿐이며 기호만으로는 형이상을 알 수가 없지만, 적절하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말하는 형이하의 법은 실은 법 자체가 아니라 개념화 혹은 언어화된 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형이상의 리는 아예 다른 차원의 것이다. 법은 현상으로 나타나며 사람들은 거꾸로 현상의 관찰을 통해 법을 추측하나, 그렇게 밝혀진 법은 어디까지나 개념화된 근사치이며 언제든지 반박될 수 있다. 세계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숫자나 언어로 만들어진 어떤 규칙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상상하는 건, 수염달린 누군가가 세계를 만들었다고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미신적이다. 학문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며 "과학은 반증가능성이 있어야 한다"고도 하지 않는가. 따라서 언어와 언어적 사고를 통해 형이하의 법도 아닌 형이상의 리로 다가간다는 건 더욱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법을 향해 관찰을 계속하여 근접하다가 리를 깨닫는 방법도 있으나("격물치지" : 춘하추동을 보며 리를 깨닫는 등), 곧장 형이상의 리로 들어가는 것이 빠른 방법이며, 그러려면 관찰하는 대신 그 관찰하는 자아를 잠시 놓아버리고 리에 "동기화"해야 한다. "지금 자명한가?".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理卽晝日, 論卽夜月, 月光何出, 日月合明.
리理는 곧 낮의 해고 론論(참나로부터의 직관이 아닌 추론을 쓰는 철학, 수학, 과학 등의 모든 지식)은 곧 밤의 달이니, 달빛은 어떻게 나오는가. 해의 빛을 받은 것일 뿐이니, 모든 론論은 심기리心氣理의 마음닦음을 바탕으로 해야 제대로 되며, 해와 달이 합쳐져야 가장 밝을 것(日+月=明)이다.
과학에 대해서는 블로그의 다른 글에서 이미 이야기했으니, 수학에 대해 말해보자. 수학도 이미 입자설을 기반, 고정된 세계를 다룬다(수학을 '입자설'이라 부른 이유는, '입자설'의 근간이 '우주의 근본에는 입자와 입자를 나누는 경계가 있다'는 것인데, 수학이나 논리학의 기반은 모순율과 배중률, 즉 개념이나 요소 간의 절대적인 경계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자설'을 '고정된 세계'라 부른 이유는, '입자가 아무리 충돌하고 관계 맺으며 변하는 것처럼 보여도 변하지 않는 근본 입자가 있다'는 것이 입자설의 전제이기 때문이며, 이로써 시간은 입자 혹은 개념 혹은 수의 이동에 대해 그래프의 한 축처럼 공간화되기 때문이다). 함수는 입자 즉 고정된 수 간의 관계이기에 변화 자체를 다룰 수 없으며 변화가 공간화된 박제다.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좀 더 함수를 다듬은 것이 통계확률이며, 통계함수는 현실의 각 분야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패턴을 다루기에 언뜻보면 형이상적 리理를 나타내는 데에 가장 근접한 것처럼 보이나, 그 통계확률 또한 함수이기에 입자들 간의 관계로 규정되며 입자 이전의 본래의 패턴, 형이상의 리에는 주역만큼도 접근할 수 없다. 요즈음 사람들이 동양 철학과 많이 연결짓는 복잡계 과학 등도, 그것이 마치 주역의 괘 풀이가 다양한 그림과 글로 풀어지듯(하나의 언어의 경계로 잡혀 '입자'처럼 박제된 개념은 결코 진리일 수 없다. 만인이 있으면 만인의 언어로 각기 표현되나 결국 그것들은 하나의 잔상임을 직관을 통해 모두 한 마음이 될 때에만 깨달을 수 있는, 마치 만인을 자유로운 한 마음(일심一心, 염화미소)으로 이끌기 위한 인도자 혹은 표지판 같은 그것이 진리에 가까울 것이다) 형이상의 직관으로부터 나온 완전히 고정되지 않은 다층적 텍스트가 아니라, 직관이 아닌 현상을 통한 추론의 종합이며 그 추론의 형이상적 전제가 명확하지도 않다면, 그 이론이 아무리 정밀하다 해도 아집을 위해 쓰이는 도구일 뿐 형이상의 리, 진리에는 다가갈 수 없다. 주역은 형이상의 리에 대한 자명한 직관(자아가 아니라, 명상 등을 통해 나와 남이 다르지 않은 참나-세계를 운영하는 자리-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체험"하는 관점)에서 시작되었기에, 당연히 그것도 기호화되었으므로 진리에 대한 모사이지만(내가 여기서 '어떤 복잡한 이론보다 주역이 낫다'는 것은 그 주역을 읽는 이가 직관을 자유자재로 쓰는 성인이라는 가정 하에서다. 주역 자체는 가장 근원적이며 원시적인 기호이기에 다층적 텍스트인만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완전한 헛소리도 되므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주역 자체가 옳으며 숭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역이 표현하는 것처럼 형이상의 끊임없고 무한한 변화의 잔상으로서의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주역을 제대로 푸는 유일한 열쇠가 직관인 것처럼, 추론보다도 먼저 직관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힌트를 주역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직관만 제대로 쓸 수 있어서 형이상에 곧장 다가갈 수 있다면 주역은 굳이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주역이나 다른 직관의 결과물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무시하는 것도 안 되지만, 필요 이상으로 신비화할 이유도 없다), 아예 관찰되는 입자에 대해 걸리지 않으므로 입자의 전제 조건인 그 관찰하는 자의 자아로부터도 자유로우며 그 상태에서는 점을 치는 게, 우연에 맡기는 게 인간이 수학으로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정밀한 통계 패턴보다 정확하다는 것이 주역의 뜻이다. 우리가 하늘의 관찰자라고 아무리 스스로를 가정한다해도 우리는 변화에 참여하는 지상의 생명이며, 파도를 타고 있는 파도타기 선수다. 파도타기 선수는 파도를 일반화하여 만든 함수를,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참고만 할 뿐 가장 훌륭한 선수는 그저 매순간의 파도에 충실할 뿐이다. 진리는, 굳이 말하자면, 소수의 천재들만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지식보다는 원시인이나 현대인이나 모두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이미 배우기 전에 알았던 것이라서 너무나 당연한 깨달음에 가깝고, 지식보다는 체험과 실천에 가까우며, 물리법칙보다는 윤리법칙에 가깝다. 우리가 먼지보다는 더 높은 수준에서 살고자 한다면 그러하다. 비유하자면, '직관'이라는 날개를 달았지만 그것을 쓰는 법을 잊어버려 '추론'이라는 다리로만 2차원 평면을 걸어다니는 개미들을 생각해보자. 그 개미들이 열심히 평면을 돌아다니면서 돌멩이들을 보며 새로운 2차원에 대한 이론을 세우고 2차원에서 깨작깨작 무엇인가를 만들며 다투는 것을 볼 때마다, 날개 쓰는 법을 깨달아 날아다니는 개미는 얼마나 안타까울까. 아마 그 개미가 땅으로 돌아와 3차원을 설명해주어도, 각자의 등 뒤에 달린 날개의 존재를 일깨워주어도 다른 많은 개미들은 믿지 못하거나 두렵거나 귀찮아서, 제멋대로 수염달린 거대한 개미 혹은 절대적인 수식 등을 상상하거나 그 날개달린 개미를 신으로 숭상하는 데 만족할 것이다(세상을 어지럽힌다며 독배나 십자가형을 줄 수도 있다). 물론 나도 땅에서 빌빌거리는 개미지만. "차원"의 비유를 달리 들어보면, 3차원의 도넛모양 도형은 하나로 이어지지만, 그것이 2차원 평면상에서는 원 두 개로 쪼개져 나타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시공간의 제약 하에 있는 차원에서는 각 물질과 생명과 자아들을 쪼개져있는 것처럼 인식하지만, 시공간의 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그 시작점, 미분되기 직전의 점(미분은 고차원의 수식 혹은 도형을 저차원으로 대략 번역하는 작업이다), 즉 개념화되기 전의 "현재" 또는 "존재" 자체에 인식을 집중하면, 그 쪼개진 것들을 개념이 아니라 체험으로써 하나인 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이 다양함과 쪼개짐으로 나타나는 저차원의 현상계를 굴리는 고차원의 하나의 존재이며, 그것을 체험한 이는 비록 몸은 저차원의 현상계에서 살더라도, 그 전에는 욕망에 이끌려다녔던 자아를 추스려 나와 남을 가르지 않고 덕을 행하는 힘을 얻는다. 이것을 체험하지 않고 그저 남에게 잘해주는 것이나 진리를 논리와 개념으로써만 추구하는 것은, 명확한 한계가 있는 행위다.
추론으로 하는 철학과 수학과 과학은, 그것이 이미 자아를 세계와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 심기리 이후이자 그것을 바탕으로 해야하는 보조적 수단이다. 인간은 더 나은 스마트폰을 쓰기 위해 태어났는가, 올바르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났는가. 사실 후자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추론을 통한 학문은 직관을 통한 형이상의 성찰보다는 훨씬 덜 중요하며, 오히려 칼을 잘못 쓰면 흉기가 되듯 직관 없는 추론은 인간을 스스로 물질화시키는 흉기가 된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이는 그렇게 많은 물건이나 복잡한 지식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
달리 말하면 철학이든 수학이든 과학이든, 그것이 참나의 직관이 아닌 자아의 추론에 기반하는 한, 추론은 반드시 그 전제가 도입되어야 가능하므로, 아무리 좋은 머리를 타고난 천재들이 달라붙어 발전시킨다고 해도 그 전제 위에 "세계의 현상들을 닮은" 이론의 미니어쳐 왕국을 세우는 것일 뿐, 그 왕국을 가능케 하는 숨겨진 전제를 파고들어가진 못한다. 또 누군가 그 왕국에 의문을 갖는다해도 그 의문을 전개하는 추론 또한 반드시 전제를 가져야 하기에 다른 전제로 대체되어 또다시 이론의 잔해 위에 다른 이론의 왕국을 짓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현상을 바라보는 전제들 혹은 관점들의 기원인 자아를 넘어서지 않는 이상 이러한 지식 탐구의 역사는 반복되는데, 반복되면서 과거의 이론들은 "이미 풀려버린 문제들"로 인식되어 잊혀지며, 지식체계는 점점 몇몇 타고난 천재들만이 이해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무엇이 되어 '진리'라는 말은 보편성을 잃어버리고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멀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추론 기반의 지식 체계에서의 '진리'란 사실 진리를 "찾은 것"이 아니라 "진리의 모조품"을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제, 언어, 자아의 거름막을 거쳐야 인식되는 추론에서의 ('이론' 뿐 아니라 그 이론이 가리키고 있다다는 의미로 정의된)'진리'는 결코 진리를 뜻할 수 없다. 그러한 지식의 탐구 과정이 직관을 자극하여 직관으로써 진리의 존재를 "체험"하는 간접적인 방식은 가능하겠지만(수학의 법이든 과학의 법이든 요리의 법이든 무술의 법이든, 어느 한 분야의 법을 완전히 몰입하여 파고들어가는 사람들은, 결국 그 끝에서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어설 즈음에 법法을 규정하는 그 바탕의 리理 혹은 신神을 마주하며, 그 이후는 그의 학문이나 기술은 리理나 신神을 드러내는 숭고한 일이 된다. "장자"의 포정도 소를 잡다가 법法의 달인을 넘어 리理의 도인이 되지 않았는가), 그러한 추론은 진리를 향한 탐구 방식이 아니라 그 진리를 현실에서 편의를 위해 적용하기 위한 도구적 방식이다. 그래서 추론의 형식으로 쓰인 글들은 그것이 논리적으로 반박되었을 경우에는 "이미 풀려버린 문제"가 되어 그저 역사적 의미만 지니게 되지만, 직관의 형식으로 쓰인 경전과 고전들(근현대 철학에서는 의도적으로 직관이 아닌 추론에 얽매인 글들, 즉 "이미 풀려버린 문제들"이거나 "예전과 같은 문제에, 실은 비슷한 것을 가리키지만 별 의미없는 차이를 부풀려 새로 만들어낸 이론과 개념들만 덧칠해 놓은 것들"이 많다. 물론 그 글들에서도 직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만, 머리 싸매며 그런 책들을 읽느니, 수천년전부터 가장 많이 읽히며 살아남은 책들을 깊이 직관하며 읽는 것이 훨씬 낫다)은 여전히 지금에서도 생생한 의의를 지니며, 오히려 그 때보다도 그 직관의 뜻이 추론을 기반으로 한 지식 체계의 경쟁에 휩쓸려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지성의 진보와 대비되는 영성의 퇴보가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자아와 추론은 어디까지나 도구임을 인식하며 쓰도록 하고, 자유로 가는 길, 진리를 탐구하려면 직관을 쓰자. 그렇게 직관(理, 햇볕)이 주主가 되고 추론(論, 달빛)이 부副가 될 때, 인간의 길은 가장 빛날 것이다. 더구나 참나를 깨닫지 못하고 욕망과 습관대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성(추론력 : 본래 이성理性은 말그대로 리理를 아는 성질이나, 형이상의 리理의 존재를 아예 알지 못하는 근현대에는 그것을 형이하의 法을 상상하는 추론력을 가리키는 데 쓴다)조차 편견으로 얼룩져 제대로 그 능력을 쓰지도 못하니, 더욱더 참나의 직관이 필요하다. 욕망을 내려놓음으로써, 이성(추론력)을 해방시키자.
仁, 義, 禮, 智, 信.
덕이란 사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인, 남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사랑이요, 의, 그른 일을 그르고 옳은 일을 옳다 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그대로 행하는 용기요, 예, 상대의 마음을 역지사지하여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적절한 방식으로만 표현하는 예절이요, 지, 옳은 일과 그른 일을 구분하는 지혜며, 신, 남이나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성실이다. 언제나 이 기준에 맞추어 성찰하자.
사단 중 가장 급한 것은 사단이 왜 중요하며 무엇이 선善인지를 아는 지혜지만, 사단의 실천을 둘로 보면 인의 즉 사랑과 정의요, 하나로만 보면 사랑 즉 남과 나를 다르게 보지 않는 마음인 인(구약의 십계를 요약한 신약의 새 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였으니, 각자 안의 신을 사랑하여 하나로 만드는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다)이다. 사랑은 "내가 받기를 바라는 일을 남에게 먼저 하라"는 것이고 정의는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은 안 해도 당장 큰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정의는 남에게 당장 해를 끼치는 것이며, 반면에 정의만 추구하고 사랑이 없는 삶은 외롭고 각박한 삶이기에, 홍익학당의 윤홍식 대표님 말씀대로 "반드시 정의를 지키되 항상 사랑을 지향하는 삶"이 道에 가까우며, 물론 더 道에 가까운 것은 사랑과 정의의 구분조차 잊어버려도 자연스레 그에 맞게 돌아가는 삶이다.
易地思之, 敬天愛人, 無相布施, 莫罪於心, 餓鬼在我, 恒燃三火, 因果應報.
내가 남의 입장이라면 어떨지 항상 생각하고, 매순간 내 안의 하늘(양심)을 받들고 오직 그에게 모든 일을 내맡겨 감사할 따름이며 그에 따라 사람을 사랑하고, (자아가 아닌 참나의 입장에서, 물질적 혹은 심리적인 댓가나 자기만족을 바라지 않고, 덕행이 마치 배고프면 밥 먹는 것과 같은 당연한 습관이 되어, 그러나 늘 새로운 마음으로) 나도 남도 아무도 모르게 보시하며, 심지어 마음 속에서라도 죄 짓지 말자(혼자 있을 때 하는 행동이나 심지어 혼자 하는 생각도, 남이 그것을 알게 되더라도 전혀 부끄럽지 않도록, 도리에 맞게 하는 것이 성인의 경지다. 처음에는 생각까지 그렇게 한다는 건 당연히 무리고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나쁜 생각이 나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혼자 있을 때라도 막아야 하며, 나쁜 생각도 그것에 빠져들기 전에 관조함으로써 가라앉혀야 한다. 참나와 함께라면 혼자 있더라도 자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나/양심이 지켜보고 있으므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습관과 욕망대로 사는 사람은 마치 속으로는 울면서 어쩔 수 없이 음식만 보면 계속 먹는 아귀가 그 안에 있는 것과 같으니, 진정한 그 자신의 주인이라 할 수 없다. 항상 세 가지 불, 즉 참나, 참나로부터 나와 세상에 적용되는 양심, 단전의 기운의 불을 살펴, 꺼지지 않고 자명하며 뜨겁게 타오르게 하자. 뿌린 그대로, 남김없이, 거두리라.
그러나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무리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주며 자신에게도 받아들일 수 없는 만큼의 고통이 돌아올 수 있으므로, 자명하게 옳은 일만을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만큼만 해야 한다. 정진과 보시는 억지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즐기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옳다. 성인聖人은 억지로거나 원래 착해서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이미 선업이 선을 낳고 악업이 악을 낳는 인과를 명백하게 깨달았기에, 나와 남이 없는 세계 자체의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보며 무엇이 선업이고 무엇이 악업인지 알기에, 마치 "불 속에 손 넣는 사람이 없듯이" 어쩔 수 없이 자연스레 선행을 하는 사람이다. 먼저 인과를 생생히 아는 것, 무엇이 진정한 선인지 아는 지혜가 우선이다. 머리를 굴려 그럴듯한 개념을 만들어 내는 '지식' 수준의 앎으로는 실천으로 자연스레 이어지지 않으므로 기껏해야 위선에 머물 뿐이며,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그런 형이하적 이해가 아니라 곧장 개념과 언어 너머의 형이상으로 들어가 진리를 "체험"한 수준으로, 이렇게 "체험"하면 너무도 명백하여 실천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앎"이며, 따라서 이러한 지혜의 "체험"이 가장 급한 일이다. 무위無爲만이 진정으로 道에 맞는 "함爲"이다.
바깥 없는 이 세계, 남과 내가 구별 없는 형이상의 원리를 따르는 이 세계는, 그 정의상 '뿌린 그대로 거두지 않는 업' 같은 잉여해는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한 세계는 혼돈일 뿐 질서가 세워질 수 없다. 이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잠시라도 게으를 수 있을까. 그런데도 게을러지는 것이 나 같은 사람이니, 계속 스스로 경계할 일이다.
성인聖人은 항상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여, 죄의 씨앗이 될 생각이 아무리 조그맣더라도, 보이자마자 다스려 큰 죄와 화를 막는다. 조금이라도 나태하거나 욕망에 굴복하여 죄의 씨앗을 내버려둘 경우, 나중에는 온 힘을 쓰더라도 막을 수 없는 죄와 업보가 되는 것을 너무나 명백히 알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이 겪어야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자신이 스스로 화를 불러들이는 일은 피할 수 있으며, 이것이 성인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수행한다고, 보시한다고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은 위선이며 그 또한 큰 죄다. 수행한다고 티나게 입고 다니거나 고통스러운 표정 짓고다니지 말고, 주변과 어울리며 웃음을 보이자. 공자의 말씀처럼, 도를 추구한다면서 눈 앞의 사람과 세상을 떠날 생각만 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神이 어디 다른 곳에 별도로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신성모독이며, 눈 앞의 책상과 나무와 이웃 모두가 神의 드러남이다. 따라서 이 현상 세계에서 다른 모든 수련들보다도 가장 道, 神의 뜻을 잘 펼치는 수련, 그것에 다가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 "내가 바라는 일을 남에게 먼저 하라"는 윤리의 황금률 뿐이다. 聖人은 어떤 위대한 능력 때문에 성인인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원리만을 제대로 지켰기 때문에 성인이다.
如把崖繩, 時時急急, 百年如日, 日如百年, 依神日新, 今生必成, 身可死易, 靈不可死, 全力成仁.
낭떠러지에서 밧줄 잡듯, 한 시가 급하게, 백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백년처럼, 한결같이 정진하자. 신(참나)에 자아를 항상 맡겨 (억지나 의무감 혹은 댓가를 바라는 마음이나 자기 만족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덕을 행하며, 다음 생 운운하지 말고 이번 생이 최고의 기회이며 이 때 이루자는 마음으로 정진하자. 몸은 쉽게 죽을 수 있어도 영(참나)은 절대 죽을 수 없으니, 몸의 두려움이나 쾌락을 위해 살지 말고 전력을 다해, 자아가 아니라 영으로서, 사랑하라.
길을 걷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매번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옮기는 것이다. 악이나 업이나 습관도, 몇 번을 반복하면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일어나는 그것만을 그때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음으로 비움으로써 이겨내야 하며, 그러한 노력이 끊임이 없어야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몸에 배는 것으로, 성인도 잠시라도 게을러지면 언제든지 악업에 빠질 수 있으며, 바로 그렇게 매순간 이겨나가는 삶을 살기 때문에 성인이 진정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즐겁고 여유로운 길이어야 한다. 하나의 무에서 다양한 유가 나온 것, 완벽한 신에게서 불완전한 자아들이 나온 것은 그것이 "보시기에 아름답기" 때문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보다는 변화 중에 끊임없이 노력하여 완벽에 가까워지는 상태가 진정으로 위대함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치트키 쓰는 게임은 아무런 교훈도 재미도 없지 않은가? 세계는 "신의 놀이" 혹은 "예술 작품"이다. 그것을 인생 동안 소풍 나와 감상한다는 느낌으로, 혹은 인격의 성숙이라는 목표가 있는 일종의 놀이를 한다는 느낌으로 즐겨보자. 진리와 양심실천에 대한 오타쿠처럼. 삶은 항상 신나는 일이어야 한다.
노력이란 될 때까지 하는 걸 말하며, 몰입이란 하면 되는 상태를 말한다. 될 때까지 하지도 않아 본 걸, 하면 되는 상태도 아닌 걸 노력이나 몰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깨달음이란 가고 가고 가는 중에 나오며, 이 한걸음 한걸음에 저항할 수 있는 산이란 없다.
마찬가지로, 몰입이란 그 어떤 일에서도 즐거움과 신명을 찾아내는 상태를 말하며, 지금 바로 신명이 나지 않으면 몰입이 아니고, 지금 하는 일에서 신명을 찾지 못했다면 노력이라 말할 수도 없다.
옳은 일이거나 해야 할 일이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일 때, 그 일에서 신명을 이끌어내어 완전히 몰입하여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일도 능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몸, 무의식, 자아를 길들이고 그 안의 잠재성을 이끌어 내는 일은, 무척 어려운 만큼이나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게임이다. 몸, 자아, 무의식은 내가 살면서 만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문제이자 원초적인 문제이며, 그만큼 거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물건이다. 그 게임에서 성공할 수 있다면, 외부의 문제들은 껌씹기보다 쉬울 것이다. 몸에서 기운을 만들어내고, 무의식을 길들여 도덕을 이끌어내며, 의식을 갈고 닦아 도덕을 위한 지혜를 마련하라. 생각, 감정, 감각, 욕망, 몸은 참나의 도구일 뿐 "나"가 아니니, 주인행세를 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 도구는 도구답게 써야 주인이 비로소 주인다워지며 도구의 아름다움과 기능을 제대로 펼칠 수 있다.
세상이 나의 몸은 너무도 쉽게 죽일 수 있으나, 참나와 그의 뜻은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절대, 영원히 죽일 수 없다. 한낱 몸이 느끼는 두려움에 영혼을 팔지 말라. 언제나 포근하고 평안한 안식처인 참나의 힘으로, 미소지으며 묵묵히 한 길을 걸어나가라. 이 몸이 죽어도 다음 몸이 그 몸을 딛고 또한 걸어가니, 그 영원한 걸음은 아무도 막을 자 없다. 자신 밖에는.
恒靜常正, 歸一常六, 常從良心, 弘益人間, 卽自由. 迷望聖蹟, 中道唯道.
언제나 매순간 마음을 비워 깨끗이 하고 항상 바르게 언행하며, 하나(구별짓지 않는 불성, 양심)로 돌아가 언제나 여섯(역과 하도낙서에서의 6, 7, 8, 9의 후천수, 즉 현실의 순환에서 항상 비움으로써 새로운 순환을 가능케 하여 망하지 않고 지속하는 상태, 즉 봄을 준비하는 겨울)으로 살자. 항상 양심에 따라, 널리 사람 세상을 이롭게 하자. 이것이 곧 자유다. 미혹할 때는 고개를 들어 성인聖人의 앞서 간 발자취를 바라보니, 이를 따라 자유에 이르는 중도(조화로운 길 : 꼭 불교적 의미의 '중도'가 아니라, '중용中庸'이나 '중화中和' 또한 비슷한 의미로서, 항상 神, 靈, 불성, 성령, 天, 참나, 양심의 뜻에 맡겨 텅빈 마음으로 살며 순간순간 바뀌는 현상들에서 그때마다 딱 들어맞는 중심자리를 찾으라는 뜻이다)는 외길이다.
'자유'란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며, 사실 그것도 제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제 욕망에 끌려다니는 노예 상태로, 욕망에 실컷 몸과 마음이 이용당하다 내팽개쳐지는 처지다(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람이 욕망에 약함을 아는 이들에게, 마치 잠시 전의 기억도 하지 못하고 미끼에 족족 걸리는 물고기처럼, 손쉽게 이용당하게 된다. 법륜스님의 말씀처럼 "쥐약인 줄 알면서도 먹는 게 사람"이며, 사람 안에는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지 않아 속으로는 울면서도 계속 먹어야 하는 어리석은 아귀가 사는 것이다. 그러나 참나를 관하여 그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입장에서 보면 그런 욕망의 아귀 또한 잔상일 뿐, 싸우고 자시고 할 일도 없이 그저 허망함을 체험으로서 자명하게 알며 욕망은 녹아 사라진다. 그래서 아집을 이기려면 그것과 싸우기 전에 먼저 명상 등으로 본성을 관해야 한다). 세계는 하나의 원리로 움직이고 사람 또한 그러함을 안다면,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개체로서 개체의 욕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개체의 마음을 하나의 원리(이데아)에 동조하여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길 밖에는 없음을 또한 안다. 개체의 욕망대로 사는 건 당장 다른 개체들의 욕망과 충돌하여 부서질 것이며, 그 과정에서 그의 마음은 한없이 벽을 쌓아 스스로 고립될 것이다. 최고의 파도타기 선수는 파도의 결을 따라 움직이며 그것이 주는 자유를 즐기는 사람, 더 나아가 파도의 결에 움직임을 그저 내맡기는 사람이지, 파도를 부수며 제 길을 만들어내려는 사람은 그저 위험한 바보일 뿐이다.
언뜻 보면 악인이 승리하고 선인이 고통받는 것이 현실처럼 보이나, 그것은 선인이 실은 진정한 선인이 아닐 때가 많으며, 근본적으로 형이상의 상(象, 이데아)과 형이하의 법(法, 물리 혹은 사회적 법칙)을 구분하지 못한 오해다. 형이하의 물질계는 아무리 작거나 큰 일이라도 법을 벗어나지 못하며, 중력이 우주 모든 곳에서 행해지는 것과 같이, 인간 사회에서도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시험에 붙을 리가 없고, 악하지만 사업 수완이 좋은 사람이 악행을 덜 하나 사업 수완이 나쁜 사람보다 돈을 더 벌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무시하고 "나는 (혹은 고통받는 타인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저 사람보다 더 착한데 왜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집이며 곧 그가 진정으로 선하지는 않음을, 즉 위선일 뿐임을 증명한다. 그 상태에서는 아무리 선해 보이는 행위를 해도, 그것을 통해 이익을 바라는 이상 욕망과 물질을 지배하는 형이하의 법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이 글에서 '자유'라 말한 것은, 요즘 현대인들이 흔히 착각을 하지만, 물질계에서의 풍요를 기반으로 한 그런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위에서 말했듯 아무리 큰 물질적 풍요를 이루어도 여전히 마음이 물질과 쾌락에 얽매여 아집 속에 같인 형국이며, 반대로 아무리 '무소유'를 한답시고 물질을 버리더라도 그것을 통해 더 큰 정신적 만족을 얻으려 하는 이상 그 또한 아집일 뿐이다. 아집에 얽매여 있음은 형이하의 법대로 움직인다는 의미이며, 요즘식으로 말하면 완전히 경제학의 '(이기적으로,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합리적인 인간'이라는 이상형에 걸맞는 인간으로 사회과학의 법칙이 예측하는대로 움직인다는 의미다. 욕망과 물질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그대로 물질화되어 마치 물리학의 물질처럼 법칙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내가 말하는 '자유'는 얼만큼을 소유하는지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으로(아무리 선한 이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하고, 옷도 입고 잘 집도 있고 다른 동물도 잡아먹어야 하며, 유마거사는 심지어 부자였다. 소인은 부귀와 권력에 얽매여 자신을 물질의 수준으로 격하시켜버리고 그것을 숭상하며 스스로 노예가 되지만, 군자는 부귀와 권력을 도구로써 남들을 돕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쓴다. 군자, 마음이 자유로운 이라야 비로소 부귀와 권력을 올바로 쓸 수 있으며, 그것을 쓰기를 두려워하거나 그것이 없다고 걱정하거나 그것을 "소유"한다는 허상에 빠지지도 않는 것이다. 우리가 꿈 속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그것은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니듯, '소유'는 허상이며 좋게 보아도 단지 일시적으로 "떠맡은" 것일 뿐이다.), 물질로 이루어진 몸은 어쩔 수 없이 형이하의 법을 따라야 하나, 마음만은 얼마든지 형이하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형이하의 법 위에 그것을 낳은 형이상의 상(이데아)이 있기에, 그 상을 마음이 따름으로써 가능하다.
형이상의 세계는 말그대로 물질 이상이기에 물질에 대한 실험과 관찰이 아닌 마음 속으로의 침잠으로만 탐구할 수 있으며, 그렇게 탐구하여 아집을 분석하고 깨면 마음이 몸에 얽매이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 때 비로소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윤리학의 황금률의 토대를, 논리적으로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데, 그 체험을 바탕으로 영생이나 자기만족 등의 아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진정한 "선행"이 가능하다(물론 이런 명상 체험 없이도 많은 분들은 그저 양심에 따라 진정한 선행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하나의 마음(일심一心)" 상태에 머물면, 물질적 부족은 물질적 부족과 그에 따른 몸의 고통으로 끝날 뿐, 더 이상 마음에서 아집과 나쁜 감정을 일으킬만큼의 지속적인 고통으로 커지지 않는데, 이것이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물질과 소유의 변화에 따라 고통과 쾌락을 반복하는 다른 사람들은 절대 맛볼 수 없는 "자유"다.
위와 같이 마음을 계속 파들어가는 것이 물질화되기 이전의, 실험 및 관찰할 수 없는 세계 탄생과 변화의 원리적 정보(이데아)에 다가가는 유일한 길이며, 이 과정 혹은 결과로서 얻는 형이상의 상(이데아)이 물질에서 펼쳐지면 형이하의 법(물리법칙과 사회과학적 법칙 등)이 된다. 이 때 이데아를 체험한 성인聖人은, 비록 몸은 형이하의 법에 매여있으나, 마음은 형이하의 법(물질에 얽매인 욕망의 법칙)이 아니라 이데아를 체험함으로써 자연스레 얻은 윤리의 황금률,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법칙을 따름으로써, 분열되어 각자 '아집'이라는 벽 속에 갇혀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서로 이어주어 마치 하나의 몸이었던 듯 서로의 기쁨과 고통을 나누는 하나로 만들어("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일심一心 : 동양에서는, 그리고 아마도 거의 모든 종교에서는, 원래 이 하나의 마음이 신神 혹은 신의 지상에서의 나타남이다. 형이상의 이데아가 형이하의 세계에서 펼쳐진, 자연스럽고 유일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윤리 법칙을 통해 물리와 욕망의 사회 법칙으로부터 정신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으로, 진정한 윤리 법칙은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 물리 법칙보다도 더 근원적인 형이상의 상象(이데아 혹은 리理)에서 바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이 주역 식으로 말하면 쪼개진 상象인 음陰을 이어진 상象인 양陽으로 바꾸어 만물을 살리는 사람, 천天과 지地를 이어주어 하늘의 뜻을 땅에 펼치는 인人이다. 신神이 인간에게 주었다는 자유의지는 바로 이것이리라. 먹고 자고 싸다가 죽어 먼지가 될 것인가, 신에게 내맡겨 신의 역사를 도울 것인가. 인생 백년이라지만, 사람이 제대로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젊음의 시간은 그 중에서도 얼마 되지 않는다.
주절주절 말이 많았지만, 그냥 이 모든 말은 두 줄로 다시 말할 수 있다. 옳은 일은 하고, 옳지 않은 일은 하지 말라. 무엇이 어떻게 옳은지는, 나와 남을 가르기 전의 존재, 참나 혹은 자명한 양심에게 물어보라.
지금 자명한가? 지금 작은 미혹이나 죄의 씨앗이 있지는 않은가? 지금 나와 남이 둘이지는 않은가? 지금 호흡은 고른가? 지금 道, 진리와 양심실천을 사랑하는가? 정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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