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개념2014. 11. 22. 09:10

1. 화낼 땐 화내고 슬퍼할 땐 슬퍼하더라도, 별 일 없으면 아주 약간의 미소를 지어라. 존재한다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2. 작은 관심과 배려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먼저 해라.

3. 정신이 산만해지면 일단 호흡에 집중하라. 다른 많은 명상방법이 있으니 그것들도 괜찮다. 산만한 채로 관성에 이끌려 일하지 말라. 심지어 그냥 가만히 쉬거나 놀더라도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지 말라. 정신이 산만함은 곧 고통과 근심의 시작이요, 사랑은 곧 다른 생각을 못하는 상태다.

4. 모르면 모른다고 하라. 아는지 모르는지 애매해도 모른다고 하라. 아는 것 같은데 확실하게 안다고 할 수는 없어도 그냥 모른다고 하라. 남들보다 조금은 더 아는 것 같아도 모른다고 하라. 주워듣거나 그냥 글로만 읽어서 아는 거면 차라리 모른다고 하라. 정말 진심으로, 개념과 많은 체험으로 확증하여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면 끼어들지 말라. 모른다고 생각하면 배울 수 있지만 안다고 생각하면 배우지도 못하고 그냥 편견 속에서 죽는다. 여기저기 끼어드는 게 이른바 "꼰대"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5. 머리는 차갑게, 배는 따듯하게.


6. 물건은 제자리에.

7. 동료나 아랫사람도 마음가짐은 윗사람 대할 때와 같이. 편한 사이라 말투는 편하더라도 마음가짐만은 조심스레.

8. 뒷담화, 남 지적 함부로 하지 말 것. 나부터 잘 하자.

9. 남의 칭찬할 점을 찾으면 칭찬을 진심을 담아 할 것. 단, 진심이 별로 담기지 않은 칭찬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10. 같은 말도 부정적인 어휘나 어조, 명령하거나 가르치려는 말투는 가능한 한 지양. 아 다르고 어 다르다.

11. 자기 잘못은 바로 분명하게 명시하고 사과하며,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질 것. 용서를 구한답시고 시간 끌거나 변명하거나 동정심에 호소하지 말 것.

12. 꼭 해야 할 일이 갑자기 밤에 생기지 않는 한 일찍 잘 것.

13. 밥은 건강한 재료로, 굶지 않고 골고루, 챙겨먹을 것.

14. 남의 잘못을 얘기해줄 때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직접 일대일로, 조용하지만 분명하고 간결하게. 그러나 이는 상황에 따라 방법이 달라질 수도 있음.

15. 놀 땐 놀아야 하지만, 시도때도 없이 놀거나 놀 궁리만 하고 있으면 그냥 아무것도 아닌 삶이 된다. 아무 일도 안하고 빈둥거리더라도 적어도 언제까지만 빈둥거릴지는 정해놓고 빈둥거려라.

16. 반대로 어떤 일을 하는데 그 일로 마음이 괴로와질 정도라면 될 일도 안 되므로, 잠시 그 일을 완전히 내려놓고 아무 일도 아무 생각도 하지 말 것.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자기 이름조차 모르는 바보가 된 마음으로, 호흡에 먼저 집중할 것.

17. 별로 배울 점이 없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마음이 맞지도 않는 사람들을 넓게 사귀기보다는, 그 시간에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나 사랑하는 가족 혹은 주변 사람이나 마음이 맞는 사람과 시간을 자주 보내면서 깊게 사귀어라. 그 어떤 관계라도 사랑하는 가족,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 스승, 마음이 맞거나 같은 길을 걷는 친구보다 소중한 인연은 없다. 그 인연은 정말로 정말로 소중한 인연이니, 항상 감사하라. 삶은 짧다.

18. 아무리 남들이 권장하거나 안정적으로 혹은 훌륭해 보이는 일이더라도, 스스로 하면서 보람이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라면 하지 말라. 그 시간에 아무리 남들이 천시하거나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도 스스로 보람이나 즐거움을 충만하게 느끼는 일을 하는 편이, 그 무엇보다 스스로의 영혼을 위해 낫다. 물론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덜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끊임없이 보람을 찾아 일하고(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도 분명 숭고한 일이자 자연의 모든 생물들이 행하는 일상의 섭리며, 그 일에서 반드시 나름의 보람을 찾아야 한다. 그 일에서 나름의 보람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일에서라고 보람을 찾으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여가 시간에 취미로라도 가장 보람있는 일을 하라. 삶은 짧다.

19. 별로 배울 점이 없는 책, 별로 배울 점이 없는 사람이 쓴 책을 여러 권 읽기보다는, 훌륭한 책 한 권을 여러 번 읽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요즘 세상에 훌륭하다고 소문난 책 여러 권을 읽기보다는, 수백 수천년 간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읽힌, 성인이나 현인들이 쓴 경전과 고전 한 권을 여러 번 읽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그런 훌륭한 책을 그저 여러 번 읽기만 하기보다는, 한 번 읽더라도 그 구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일상 생활에서 실천하여 검증해 보는 편이 훨씬 낫다. 실천으로 검증해야 비로소 성현의 뜻이 죽은 글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살아 이어질 수 있다.

20. 항상 기술이나 지식을 닦는 것보다
 그에 걸맞는 인격을 닦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기술이나 지식을 사용하면서 항상 양심적일 수 있는지 수시로 돌아보라. 그럴 수 없다면, 그 기술이나 지식을 닦을 시간에 인격을 닦아라. 칼은 훌륭한 요리사에게는 훌륭한 요리도구가 되고, 별로인 요리사에게는 별로인 요리도구가 되지만, 어린 아이에게는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 도구가 되고 범죄자에게는 흉기가 된다.

21. 매일 하루 동안 자신의 언행 중 양심에 맞지 않는 언행은 무엇이 있었는지, 어떻게 양심에 어긋났는지 분석하고 가능한 한 기록할 것.

22. 남의 언행이나 글과 매체 혹은 영상 속 인물들의 언행 또한 양심에 무엇이 맞고 무엇이 맞지 않는지 분석해 볼 것. 그러나 함부로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말 것.


23. 남탓이든 상황탓이든 사회탓이든 심지어 자기탓이든, 누구 탓하는 것보다는 항상 지금 상황에서 최선이 무엇인지를 찾아 선택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누구의 얼만큼의 잘못인지, 과연 피할 수 없었는지 따지는 일도 필요할 때가 있지만, 그것 또한 탓하기 위함이 아니라 미래의 더 나은 선택을 위함이어야 하며, 냉철히 끝까지 분석하고, 자신의 잘못은 무엇인지 특히 철저히 파고들어야 한다. 바꿀 수 없는 과거 일에 아까운 현재를 발목잡히지 말고, 그 경험만을 철저히 이용한 후에 버려라.


24. 마찬가지로, 오지도 않은 미래 걱정할 시간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현재에 투자하라. 한 치 앞도 못 보는 머리로 미래를 걱정하는 사이, 유일하게 내가 바꿀 수 있는 시간인 현재가 속절없이 손에서 흘러나가고 있다. 미래에 대한 예상이나 계획은 필요하지만,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미련없이 그 예상 혹은 계획을 버려라. 유일한 나의 자산은 언제나 현재 뿐이다.


25. 남과 대화하거나 함께 무엇인가를 할 때는 남을 존중하며 온전히 집중할 것. 나의 시간이 소중한 딱 그만큼 남의 시간도 소중하고, 나의 삶이 소중한 딱 그만큼 남의 삶도 소중하다.


26. 마찬가지 이유로, 지각하지 말 것. 항상 5분 전에 기다린다는 자세로 움직일 것. 기다리는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 만남을 준비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27. 약속 함부로 하지 말고, 내뱉은 약속은 더 중요한 약속과 겹치지 않는 한 반드시 지킬 것. 못 지킨 약속에 대해서는, 그 이유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철저히 책임질 것. 사람 관계에서는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약속 안 지키면 그냥 꽝이다. 그냥 모든 약속을 마치 왕에게 하는 서약처럼 생각하라.


28. 자신과의 약속 또한 소중히 지킬 것. 사실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신뢰는 자기 자신과의 신뢰감, 자신감이다. 지켜보는 사람 없다고 자신과의 약속을 남발하며 지키지 않다가는,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를 믿어주지 않는 고독과 허무감과 무력함에 빠질 것이다. 반면에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켜온 사람은 그 어떤 역경에도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을 얻는다.


29. 어떤 일이라도 잡념이 있는 채로 오랜 시간 하는 것보다는, 몰입한 상태로 훨씬 짧은 시간을 하는 편이 언제나 낫다. 양심은 몰입한 청정한 마음 상태에서 드러난다. 항상 마음을 하나로 모아 몰입 상태를 유지하라.


30. 남의 것은, 물건이든 능력이든 지위든, 나에겐 똥이다. 나의 것이라도 지금 필요하지 않다면 별다를 건 없다. 


31. 선정으로 마음을 비우고 양심으로 철저히 분석했는데도 아직 결정을 못 내리겠거나 찜찜함이 있는 문제가 있다면, 아직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시야가 좁고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니, 가만히 앉아서 계속 풀리지도 않을 고민을 하기보다는 일단 그나마 가장 덜 찜찜한 길을 택해 가라. 해보면 또 새로운 게 보이고 그 과정에서 시야가 넓어진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어느 사업가는 숙고한 뒤에도 여러 선택지 중 자명한 선택지가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동전을 던져 결정한 후 뒤돌아보지 않고 그 결정을 충실히 이행했다는데,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럴 듯한 방법이기도 하다. 


32. 깨어있음이 무엇인지 아는데도 옳지 않은 충동에 끌려가려고 하먼, 그 충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딴짓말고 명상하라. 조금이라도 빈틈을 주어 참나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 충동이 어느새 이리저리 끌고 다닐 것이다. 깨어있으면서도 악업에 이끌리는 것은 깨어있음이 지혜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니, 반드시 명상하여 그것이 나와 남을 망칠 악업임을 마음 속에 새긴 후에 다시 나와라. 더 큰 욕망을 상대하려 하지 말고 딱 그 순간의 욕심만 이겨라.


33.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그건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그대로 청정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삶은 죄업에 대한 처벌의 장이 아니라, 캔버스이자 학교이며 소중한 기회다. 깨달은 자는 이 땅을 떠나 여정을 끝내거나 더 나은 곳에 가는 자가 아니라, 이 땅에서 더 나은 내일을 끝없이 만들어가는 자다. 죄악이 끝이 없다면, 마찬가지로 선도 끝이 없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갈지는 자유지만, 어떤 세상이 더 살만할 세상인지는 자명하다. 받아들이자.


34. 욕심은 무작정 꺾으려 한다고 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억지로 누르면 언젠가 왜곡된 형태로 화산처럼 폭발할 것이다. 욕심은 억누르기보다는 서서히 길들여 나아가는 것이다. 먼저 잠시 명상이나 마음 비우는 여러 기술을 통해 초연해진 뒤에, 그 욕심이 양심에 맞는 마음인지 바라보고(식욕이나 수면욕은 생존을 위해 필요하며, 그 밖의 욕심도 나와 남을 해치지 않고 이롭게 하는 욕심이라면 억누를 이유가 없다. 가령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가의 미적 욕구나, 어린아이의 자연스런 창조적 행위, 그 밖에 모두에게 이로운 자아실현의 욕구를 억누르려 한다면 그게 과연 선이겠는가), 그 욕심이 옳지 않다면 그 욕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그 생각, 감정, 감각을 바라보기만 하라. 완전히 가라앉으면 그 순간 욕심을 이긴 것이며, 그렇게 매순간 승리하는 사람이 곧 성인聖人이다. 혹시나 욕심을 가라앉히지 못하더라도 좌절하여 포기하지 말고(聖人이 아닌 한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확실히 정하여 욕심과 그 선에서 타협하고, 서서히 길들여 나아가라. 습관으로 뿌리 깊게 박힌 욕심을 한 번에 없애려 하는 건 또다른 좌절감만 심어줄 뿐이다. 조금씩 가지치기부터 하라. 퇴보하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길 수 밖에 없는 싸움이며, 욕심 또한 자연의 이치에서 나온 마음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적절히 예쁘게 다듬은 욕심은 나와 남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35. 남과 비교하지 말자. 나에 대한 남의 평가가 어떻더라도, 삶의 주인은 온전히 나 뿐이다. 왜 그 타고난 권한을 알아서 포기하려 하는가? 주변이 뭐라고 하든, 비행기를 태우든 비난을 퍼붓든, 마음이 어지러워질 것 같으면 그냥 "몰라", "괜찮아", "배째"라는 마음으로 초연히 바라보자. 내가 유일하게 이겨야 하고 인정받아야 할 대상은 나 뿐이며, 내 안의 양심이 이끄는대로만 가면 된다.


36. 목표는 너무 크게 세우지 말고, 한입에 먹기 좋도록 잘게 썰어서 작은 목표들로 나누고, 지금 당장의 목표들을 하나씩 이뤄가는 재미로 계획하고 실행하라. 너무 큰 목표는 그저 망상과 좌절만을 남길 뿐이지만, 반대로 아무리 큰 목표라도 잘게 쪼개다보면 지금 당장 충분히 이길 수 있을 정도의 과제로 나뉜다. 그리고 그렇게 조그만 성공을 계속하다보면 망상과 좌절이 아닌 능력과 자신감이 자라나서 더욱 힘을 실어줄 것이다.


37. 가장 좋은 가르침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가령 책을 좋아하고 글을 잘 이해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무엇보다 그 부모가 책을 좋아하지 않고는 힘들다.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든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든, 그들 옆에서 양심을 따르는 삶을 직접 사는 것만큼 더 나은 가르침이나 보살도는 없다. 행동 없는 말은 아무리 멋져도 공허하다.


38. 자연의 만물은 각자 타고난 역할대로 살아가며 자연의 조화로움을 드러내는데,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타고난 기질이나 재능이나 선호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자연을 따르는 삶이며 따라서 가장 보람있는 삶이다.


39. 사고와 대화의 깊이를 깊게 해주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좋은 책을 읽는 것이다. 너무 글에 매이는 것도 물론 좋지 않지만, 책을 읽지 않고 사고와 대화의 깊이를 깊게 하려는 것은 지도 없이 탐험하는 것과 같다.


40. 위에서 가능한 한 보람있고 즐거운 일을 하라고 했는데, 사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하기 싫지만 해야하는 일들이거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 과정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일들이다. 배변을 참을 줄알게 되면서 아기가 어린이가 되고, 미래를 위해 당장의 고통을 참을 줄 알게 되면서 어린이가 철 들었다고 하듯이, 무엇인가를 원한다면 그것이 큰 만큼 고통 또한 견딜 수 있는 것이 성숙이다. 아무리 자신이 사랑하고 재능도 있는 일을 열심히 해서 이름을 남긴 위인들도, 그들이 그런 위대한 일을 이루기까지는 그만큼의 엄청난 고통을 견뎌야 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고통이 무서워 뜻을 포기할 만큼의 고통을 견뎠기에 위인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참을 수 있도록 하는 의지는, 그들이 타고나는 것이거나 외부로부터 자극받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보상이나 과거의 기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깨어있음,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현재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선정의 힘에서만 나온다. 위인들은 명상을 안 배웠더라도 이 순간에의 몰입의 힘을 익혔기에, 다른 이들과 같은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엄청난 일을 이룬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에고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 내면의 신성에 내맡김으로써 나오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의지는 이유가 없는 "그냥"의 마음이며, "아무 것도 몰라"의 마음이다. 어떤 일을 이루고 싶거든, 그 일에 필연적으로 따라올 고통을 받아들여라. 과정 없는 결과는 없다. 그리고 그 고통을 나약한 에고로 악을 쓰며 이겨내려 하지 말고, 마음을 내려놓고 선정 혹은 몰입의 힘으로 초연히 현재에만 집중하여, 그 순간 순간의 고통만 지워나아가라. 그러면 뻘밭길이라도 어느새 만리를 가 있을 것이다.


41. 설사 세상 그 누구를 속일지라도 자기자신만은 절대 속이지 말라. 스스로조차 속이며 믿지 못하게 되면 정말 기댈 곳 없이 그 인생은 끝장이다. 자기합리화, 자기기만을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자기합리화는 정신적 면역체계를 마비시켜서, 그 어떤 말도 안되는 생각도 걸러지지 않고 언행으로 나타나도록 하여, 스스로가 죄를 저지르면서도 선하다 믿도록 만든다. 가장 고질적이고 악독한 마음의 병이다. 수시로 깨어 마음을 관찰하라. 자신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반성하라.


42. 삶의 변화는 습관의 변화이고, 습관의 변화는 무슨 대단한 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제껏 가지 않았던, 그러나 더 옳은 길을 한 발짝 내디딤으로써 일어난다. 즉 삶을 바꾸려면 항상 지금 이 순간 아주 조금이라도 바꿔야 하며, 계속 바꿔야 한다(노자 : "항상 부드러워라"). 옳지 않은, 혹은 덜 옳은 습관을 지금 이 순간 유지하는 것은, 결코 현상유지가 아니라 앞으로 이겨내야 할 그만큼의 악업을 쌓는 것이며 옳은 길에서 더욱 멀어지는 것이다.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건 스스로 망하는 길이다.


43. 뜻을 세웠다는 것, 의지라는 것은 그저 "해야지"라고 마음먹은 상태가 아니다. 진정한 의지란 자나 깨나 그 대상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아 다른 생각을 하려해도 하기 힘든 상태를 말하며,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상황을 탓하지 않고 계속 추구하는 상태이다. 그 정도가 아니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의지라고 부르지도 말라.


44. 사랑과 양심의 시작은 거대한 무언가가 아니라, 집에서는 가족에게 역지사지하고 밖에서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더 큰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한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것이다. 충효는 그래서 유교에서 양심의 가장 기본적인 지표가 된다.


45. 채워지지 않음은, 한자 욕자가 풀이하면 계곡처럼 파인 마음이듯이, 욕심의 본질이다. A에 대한 욕심이 A를 얻음으로써 해소되는 것 같지만, 욕심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또다른 대상을 기어코 찾아낸다. 말하자면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어도,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는 상태가 도대체 무슨 상태인지도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욕심 자체는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을 다시 파괴하고서라도 새로운 대상을 찾아낼 것이다. 욕심 자체에게는 대상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직 그 채워지지 않음이 그 본질인 것이다. 물론 인간과 생명은 욕심이 없으면 잠시도 생존할 수 없으며, 이 다채로운 세상은 유지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욕심이 서로를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며, 나아가 자신의 욕심을 통해 남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부정하는 것도 욕심의 일종인 것이다. 금욕주의자들의 도덕적 우월감은 따라서 명백하게 불필요한 욕심, 죄다. 황금률은 "나를 희생하여 남을 도우라"거나 "남을 희생하더라도 나를 위하라"가 아니라, "나도 남도 모두 똑같이 추구해도 되는 만큼"의 욕심만 채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채워지지 않음이 본질인 욕심을 멈추는, 불가능해보이는 일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힘은, 욕심이 채워진 순간에만 잠시 사람들이 맛보는 만족감 즉 열반락을, 오히려 마음에서 모두 내려놓음으로써 항상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채우면 욕심이 잠시만 말을 잊을 뿐이지만, 비우면 욕심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즉 명상은 발상의 전환이며, 욕심 경영의 필수 조건이다.


46. 어제보다 더 지혜로와져야 한다. 지식을 쌓으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더 옳은 일인지 알라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책보다 더 지혜에 좋은 것은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날이 진보해야 사는 의미가 있다.


47. 도나 진리나 선은 금욕이나 무조건적인 베품에 있지 않다. 베풀 땐 베풀고 기쁠 땐 기쁘고 화낼 땐 화내고 슬플 땐 슬프고 바랄 땐 바라되, 그것이 나와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남 모두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처벌을 할 때도 결국 그 죄인이 성숙해지고 죗값을 잘 치르도록 돕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그러한 적정한 선이 중도이며, 그 선을 그 때마다 잘 찾아내는 자가 성인이다. 하고싶은 일을 하라. 그 일을 하되, 그 일이 나와 남에게 도움이 되도록만 하면 된다. 누구에게나 지금 당장이라도 그런 일은 분명히 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좋고, 남은 내가 그 일을 힘으로써 도움을 받는 그런 일이. 그런 일만이 삶에 지워지지 않을 "의미"를 준다.


48. 역경과 죗값은 달게 받아라. 피하려고 해도 절대 피할 수 없음이 인과법이자 진리이니, 피할 수록 갚아야 할 것만이 늘어날 뿐이며, 역경이 아니고서는 진정 남의 고통을 이해할 수도 없으니 공부가 늘지도 않는다. 그러하니 역경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 안에서 가능한 한 많은 진리를 체득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롭다. 역경은 훌륭한 문제집이다.


49. 진리는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 가깝다. 개념들을 모아 발명해내려 하지 말고, 일단 모두 내려놓고 겸허히 들어라. 만물과 모든 사소한 사건 뒤의 공통적인 배경음을. 그것에 반응하는 양심의 소리를. 그 어디에나 있어서 오히려 성심을 다해 들어야 하는 소리에 근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멋들어진 개념의 성도 한낱 신기루일 뿐이다.


50. 어떤 일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좋기만 한 건 공짜 사랑이다. 그런 일을 하는 건 흔치 않은 행운일 뿐, 언제나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랑은 조금의 역경에도 가치가 가벼워질 위험이 있으며, 그 일이 양심에 어긋나게 되어도 모를 가능성이 높다. 일부러 고통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지만, 살면서 좋아하는 대부분의 대상은, 그것이 처음에는 아무리 좋더라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만큼 큰 고통을 요구하며, 나태나 두려움 등의 욕심이 끼어들어 포기하도록 유혹한다. 이런 과정은 원망하거나 합리화할 것 없이,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다. 욕심은 나의 몸, 나의 세포들이 일으키는 마음으로, 근시안적이기 때문이며, 욕심에 휘둘리는 세상 속에서 양심을 행하는 것은 그만큼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때마다 해야할 일은 일어나는 욕심을 이겨내고, 양심이 시키는 바대로, 고행하는 마음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욕심을 이겨낸 자만이,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그만큼의 정신적 보상과 업의 정화와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으며, 누구나 노력없이 손쉽게 그런 보상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값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면, 나태함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 일을 행하라. 우회로는 없다.


51. 아는 만큼 다 할 수 있으면 인생에 어려움이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과 그것을 하는 것과는 엄청난 습관과 업과 무의식의 간극이 있다. 사실 우리가 "알았다"고 처음 생각했을 때는 그 개념을 처음 들어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치 돌 위에 손으로 한 번 쓴 것과 같아서 금방 날아가기 마련이다. 그것이 정말 옳다면, 돌 위에 손으로 수도 없이 써서 마침내 돌이 닳아 새겨지는 것처럼, 수도 없이 그것이 정말 자명한지 틈나는대로 스스로 묻고 자신을 설득하고 되새기고 몸에 익도록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수도 없이 해서 마치 "2X2=4"거나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수준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때, 그걸 하지 않고는 몸이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할 때, 그 때에야 그것을 진정으로 "아는" 것이며 습관과 업장이 바뀐 것이다. 


52. 행여 마음 속 깊은 곳에서라도 절대 오만하지 말고, 사람 차별하지 말라. 역지사지가 조금이라도 된다면 차별받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했을 때 그렇게 행동할 수는 없다. 사람을 마음 속에서만이라도 차별하여 약간의 우월감과 안도감을 얻으려는, 누구나 갖고 있는 조그만 마음이, 세상을 이 꼴로 망쳐왔다. 착취와 학살은 그 마음들에 권력자들이 약간의 불꽃만 튀겨주면 알아서 일어났던 일들이다.


53. 무엇보다 깨어서 몰입하라. 1초 뒤에 헛짓거리를 하더라도 완전히 몰입하는 1초의 삶이, 마음이 쪼개진 채로 어중간히 사는 1년, 아니 수 십년의 삶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고 더 깊은 맛을 내며 더 의미있다. 이것은 몰입해 본 이라면 분명히 체험할 수 있는 사실이다. 1초 전에 뭘 했든 1초 뒤에 뭘 하든, 그런 건 다 잊어버리고 이 순간에만 몰입하라. 1초만이라도 깊은 몰입을 경험한 사람은 그 맛으로 계속 수행하여 인격을 바꿔나갈 수 있지만, 억지로 남이 하라는대로만 따라가며 마음을 여기저기 나눠쓰는 사람은 언제나 끌려다닐 뿐 진정한 몰입의 깊은 맛을 모르기에, 아무리 많은 시간을 자신이 생각하는 덕행에 쏟아부어도 제자리 걸음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과거와 미래 말고, 지금 이 순간, 정말 자신 앞에서나 신 앞에서나 누구 앞에서나 당당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54. 누구도 온전히 옳을 수 없으며, 한편으로 누구도 그 자신이 틀렸다고 믿으면서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거나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즉, 상대 의견이 아무리 명백히 틀려보여도 그 사람이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게 된 그 나름의 이유를 입장바꿔 생각해보고, 그것이 여전히 틀렸더라도 최대한 이해하여 나의 견해에도 비추어보아 나에게 틀린 점은 없는지 돌아본다. 그것이 지혜를 기르는 방법이며, 아집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다.


55. 아무리 악인이더라도, 그리고 그에게 혹독한 벌을 내리더라도, 그것은 마치 환자에게 치료를 위해 칼을 대는 것과 같아야 한다. 보살에게는 모든 중생이 구해야 할 대상이며, 환자가 아무리 밉더라도 의사는 일단 찾아온 환자를 최선을 다해 고쳐야 하는 법이다. 악인이나 어리석은 이는 그렇게 된 연유가 반드시 있으며, 따라서 구하거나 고칠 방법이 있다. 물론 감싸기만 해서는 오히려 그를 망치니 그에 맞는 합당한 벌을 주기도 해야 하지만, 단순한 복수와 나의 감정의 해소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결국엔 그들도 구해야 한다.


56. 즉각적인 쾌락은, 적절한 식욕이나 수면욕 등 그것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일단 경계해야 하며 양심에 어긋나지는 않은지 특히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첫째 즉각적인 쾌락에 중독되어 삶에서 더욱 중요한 일들, 공부나 더 궁극적으로는 덕을 펼치는 데에 방해가 되고 욕망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하여 시야를 좁게 하기 때문이며, 둘째로 그것이 공짜처럼 보여도 실은 가장 소중한 몸과 시간과 인간관계를 축내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에서 벗어나 즉각적인 쾌락으로 허비하지 말라. 깨는 순간 밀려올 허무감이 계속 불어날 뿐이며, 그 사이 세상을 망치거나 방조하는 죄만 지을 뿐이다.


57. 벌어먹기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는 남들의 평가가 중요하고, 일에서 보람을 찾는 사람에게는 스스로에게 진심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벌어먹는 것도 결국엔 후자가 전자보다 더 수월해진다. 그 자신에게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인정받는 것보다 더 자신감과 만족감을 충전시켜 정진해나가도록 하는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부터 자신에 대한 가장 냉철하고 엄격한 감시자이자 충실한 조언자, 따듯한 위로자로 만들어라. 그 어떤 고난에서도 그는 외롭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몰라주어도 그 자신에게만 인정받으면 그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논어에 군자는 아무도 몰라주어도 기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런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들도 믿고 기대는 법이다. 그 누구보다 자기자신과 먼저 친해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으며 모든 경험을 공유할 사람은 자기 자신 뿐이다. 자기 자신의 장단점과 마음 깊숙한 곳, 생각과 감정 너머까지 수시로 탐험해야, 비로소 남도 이해할 가능성이 열린다. 자기 자신과도 친해지지 못하면서 어떻게 소통을 이야기하겠는가.


58. 최고의 쾌락이자 가장 지속적이며 아무 비용도 없고 허기지지 않는 쾌락은 마음을 모두 내려놓을 때 오는 열반락이다. 다른 모든 쾌락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주 잠시 원하는 걸 얻는 순간에 자아가 말이 없어지면서 느끼는, 열반락의 대체품일 뿐이며, 그 사람들은 그 쾌락이 마음이 잠시 조용해짐으로써 온 것임을 모르고 그 물건이나 대상을 얻음으로써 왔다고 생각하기에 금방 다시 허기져서 아귀처럼 다른 대상을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열반락을 증폭시키는 것이 호흡에 집중함으로써 얻는 에너지이며, 열반락의 궁극은, 그 열반락으로 세상을 바꾸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며 현실이 그대로 열반이 되도록 하는 것, 남을 나처럼 여기는 마음과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행동, 즉 양심과 사랑이다. 다른 자잘한 쾌락들에 시간 낭비하지 말라.


59. 욕심과 양심, 악과 선의 차이는 '나'의 개념에 제한을 두느냐의 여부다. 인간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정말 놀랄만큼 냉혈한이 되어 어떤 짓이라도 방조하거나 잔인해질 수 있다. 반면에 보살은 지구와 우주 어느 곳에서라도 고통받는 중생, 길잃은 양 하나까지 구하겠다는 원을 세운 이이며, 사실 양심이란 경계짓기 전의 텅빈 마음에서 나오기에, 원을 세웠다기보다는 그냥 양심이 그렇게 생겨먹어서 따르다보면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양심 있는 이라면 세상 어느 한 구석에 고통받는 이가 있다는 걸 안다면 마음 아주 일부분에서라도 찜찜함을 분명히 느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 목표이고, 현실에서는 각 자아의 역량의 한계가 분명히 있으므로 섣불리 남 구하려다 자기가 당하고는 오히려 양심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먼저 자신의 양심을 충분히 파고들어 스스로를 구하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지혜를 넓혀 일상에서 만나는 주변인 중에서도 스스로 무언가 고칠 의지가 있는 사람부터 가까이 하며 구해야 한다. 어두운 세상에서 함께 어둠에 파묻히지 말고 아주 작은 빛과 소금이라도 되어야 한다. 이런 빛과 소금이 사라진 세상은 지옥 자체일 것이며, 지금까지 나셨던 몇 안 되는 성인이 없었다면 이미 지옥이었을 것이다.


60. 같은 사람처럼 보여도, 각자가 사는 세상은 각자 마음 속의 세상이며,  특히 각자의 정신적 수준에 따라, 특히 양심에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서로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산다. 자신이 보는 것을 남들이 보지 못한다고 답답해 하는 것은 이미 그가 낮은 수준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뜻이며, 그 시간에 더 높은 곳에 올라 더 많은 것을 보고 남들을 이끌어 줄 궁리를 하는 것이 낫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무관심하거나, 무시하거나, 심지어 증오하는데, 양심에 따르고자 하는 이라면이러한 실수를 해서는 안된다. 비유를 들면, 세상은 소수의 눈 뜬 사람들과 다수의 눈 먼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리고 소수의 눈 뜬 사람들도 더 잘 보는 사람과 흐릿한 사람으로 나뉘며, 더 잘 보는 소수 중의 소수에서도 한참 나뉠 수 있다. 다수가 생각하듯 이 세상은 그들이 볼 수 있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다. 이 때 다수의 눈 먼 이들 중에는 소수의 눈 뜬 자가 말하는 코끼리를 헛소리라고 무시하는 자들도 있고 그 소리를 제 멋대로 해석하며 맹신하는 자들도 있을 것인데, 어찌 됐든 눈 먼 이들끼리 하는 코끼리 이야기는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무시하지도 말고 맹신은 더더욱 하지 말라. 신, 도, 선함, 진리, 양심, 기 같은 형이상적 개념들 또한 형이하적 개념들이 그러하듯 철저히 체험으로 검증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분명히 체험할 수 있으며, 누구나 그러할 수 있다. 눈 먼 이들도 멀쩡한 눈은 갖고 있으며 단지 두려움, 무지함, 욕심, 그 동안의 업 때문에 뜨지 않을 뿐이다.


61. 삶에서 정답은, 적어도 그 상황과 자아의 역량 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답, 가장 적절하며 조화로운 답은 양심 안에 항상 있으며, 그것도 매우 구체적이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말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양심의 소리에 둔감하여 욕심에 의해 왜곡된 정보에 기반해 판단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그 공정한 자리에서 자명한 답을 궁리하고, 그대로 행하라. 이것을 반복하며 지혜를 쌓아라. 파도타기 선수가 파도의 결을 따라 한 번도 엎어지지 않고 파도를 타듯, 선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62. 채워지지 않아 괴로운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자아가 내면의 신성, 참나, 양심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강력한 신호다. "너희는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지 말고 성령만 따르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아무 것도 가르지 않는 마음인 내면의 신성은 자아에게 꼭 필요하고 양심을 어기지 않고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욕망만을 허락할 것이며, 자아는 만족을 외부에서 찾을 필요 없이 이미 신성에 가까워 짐으로써, 마치 태양 옆에 있는 쇳덩이처럼 차가움을 모르고, 밑빠진 독이 바다에 빠진 것처럼 부족함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충분히 먹고 자서 선을 행할 힘이 있는데도 무언가를 더 바란다면, 신성에서 멀어지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신성에서 멀어진 자아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며 허무와 고통에 내던져진, 가지에서 떨어진 나뭇잎일 뿐이다.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갖고 싶은지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 옳은지를 생각하라. 내면의 신성, 본래 완벽한 양심이 하려는 일을 그저 옆에서 자아가 조금씩만 돕는다면, 자아도 "함께 들어올려져" 위대해지리라.


63. 인생이란 게임이다, "양심 타이쿤"같은. 누가 더 내면의 양심의 소리, 세상을 굴리는 신성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잘 듣고, 양심이 주는 순간 순간의 퀘스트를 빠트리지 않고 해결할 것인가? 그럼으로써 얼마나 높은 레벨에 올라 더 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양심의 명령을 받들어나의 마음과 주변과 세상을 바꾸고 경영해가는 경영 시뮬레이션이자 자아의 영적 레벨을 올려가는 육성 시뮬레이션 혹은 mmorpg. 그 와중에 선업으로 쌓은 포인트는 더 나은 결과로, 악업으로 쌓은 죄는 어김없이 합당한 죗값으로 돌아온다.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인과는 숨을 곳 없이 엄정하기 때문이다.


64.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하고, 슬퍼해야 할 때는 슬퍼하고, 기뻐해야 할 때는 기뻐하라. 인간의 감정이 없는 것은 성인이나 도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환자거나 소시오패스다. 그러나 그 감정에 취하지는 말고 그 상황에 맞는 만큼만 맞는 형식으로 표현하며, 상황이 바뀌면 깔끔하게 감정을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오히려 제대로 분노하고 슬퍼하고 기뻐할 수 있다.


65. 진정으로 원한다는 건 그것에 몰입하여 될 때까지 하는 것으로 자연스레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원한다고 하면서도 몰입하지 못하고 어영부영하거나 딴 생각을 하는 건 원하는 게 아니라 그냥 기회되면 공짜로 훔쳐보겠다는 도둑놈 심보다. 책임회피는 만악의 근원이다.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시크릿"이 한 때 유행이었는데, 이 때 "원한다"는 의미가 그에 합당한 행위, 그러니까 이루어질 때까지 업을 쌓겠다는 걸 포함한다면, 그것은 진리다. 땅 속 어딘가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가장 확실하면서 불행해지지 않는 방법은, 몇 미터까지만 파야지라면서 파거나 땅 속에 있는 보물이 올라오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보물이 나올 때까지 그냥 보물을 잊고 땅 파는 걸 즐기는 것이다.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는 그 과정을 존중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대해서는 그냥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치부하는데, 물론 내면의 신성은 누구나 언제든 마음을 내려놓음으로써 접근할 수 있으나,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마치 물리학에서의 관성의 법칙에 의해 폭주하는 기차처럼, 그 전까지 수많은 시간 동안(전생을 믿는다면 수많은 전생까지 포함하여) 지어온 업과 습관이 생각을 쉼없이 몰아치므로, 그냥 한 번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마음이 바뀔 리가 없는 것이다. 담배를 끊으려면 담배를 피고싶다는 욕망에 져온 횟수만큼 피고싶다는 욕망을 이겨내야 겨우 마음을 원래대로 돌릴까 말까 할 수 있으며, 온갖 고정관념들은 그것이 강화되어온 시간만큼 다른 생각을 꾸준히 일으키고 실천해야 몸의 기억이 바뀌고 생각이 바뀔 수 있다. 폭주기관차를 한번에 세우고자 한다면 그만큼의 충격적인 경험이 필요하거나 참담한 패배가 기다릴 뿐이며, 땅 파는 것을 즐기는 마음으로 될 때까지 생각으로 마음을 씻고 행동으로 몸의 기억을 바꾸는 방법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렇게 무엇인가를 원하고, 될 때까지 한다면, 그것을 즐긴다면, 언젠가는 아마도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나, 그에 대한 댓가가 무엇이 될지는 그 원하던 것이 양심에 맞느냐, 자연의 섭리에 맞느냐는 야부에 달려있다. 즉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양심을 저버리고 남들에게 해를 끼쳤다면, 설사 그것을 얻었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욕망 따위보다 훨씬 더 큰 흐름인 섭리에 의해 금방 무너질 것이며, 그 악업의 댓가는 외부의 보복 뿐 아니라 계속된 악업으로 이미 폭주기관차처럼 힘을 받아 관성에 의해 계속 악업을 갈구하게 된 그의 마음, 배가 터져 죽을 때까지 먹어야하는 아귀처럼 된 그 마음으로 계속 치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악업의 궤도에 탄 기차를 선업으로 돌리려면 얼마나 많은 고통이 필요하겠는가. 반면에 그가 원하던 것이 양심에 맞는 일이라면 자연히 양심을 낸 자연의 섭리와도 맞으므로, 노력한다면 그만큼 얻을 것이며, 그것은 오래 지속되어 또다른 선업을 낳을 씨앗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성인이라 불리는 분들은 몇 분 안 계셨지만, 그리고 그 분들은 권력도 부도 누리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몇 명에게만 도를 보여주셨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왕보다도 많은 이들의 마음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더 받들어지시고 그들 덕분에 그래도 무엇이 옳은 삶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나와 세상을 지탱해온 것을 보면,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업을 짓기에 따라 얼마든지 어떤 환경에서도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니"(요한복음- 여기서 "나를 믿음"이란 당연히 2천년 전에 사셨던 예수님 개인의 자아를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선의 인격적 표현이신 예수님으로서 즉 자연이 선하며 인과에 따라 엄정히 굴러간다는 것, 그 선이 예수님처럼 각자의 인격 안에 양심으로 엄연히 살아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생을 바쳐 피흘려 가르치신 이런 자명한 가르침을 멀리하고 기독교를 개인숭배사상으로 오도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과 다른 인류를 망치는 "독사의 자식들"이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구절들이나 부처님이 하셨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 같이 각 종교의 경전들에서 나오는 '나'라는 말은, 개인의 자아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내면의 신성, 진짜 "나", 참나, 양심을 가리킬 때가 많다. 그렇게 풀어야 모든 성인의 말씀이 하나로 보이고 그 뜻이 명쾌해진다).


66. 간단히 말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삶은 의미있고 그렇지 않은 삶은 의미없다. 무슨 거창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역량에 맞게 가족이나 주변인들만이라도 행복하게 만들어주려 노력한다면, 그래서 더 선이 악보다 세상에 많아지도록 조금이라도 돕는다면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타고난 재능과 기질을 잘 이용하여 세상을 모두 이롭게 하는 삶이 본래 삶의 의미다. 항상 자문하라; "이 행동은 세상에 어떤 보탬이 되는가?". 삶의 의미와 보람은 저절로 채워질 것이다.


67. 작은 지출을 아끼면서 큰 돈이 새어나가는 것을 모르는 이는 어리석다.
돈을 아낄 줄은 알면서 사람 아낄 줄 모르는 이는 어리석다.
사람 아낀답시고 주관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이는 어리석다.
욕망을 위해 건강을 버리는 이는 어리석다.
무엇보다 시간 아까운 줄 모르는 이는 어리석다.
그 시간에 무엇을 해야 진정 의미있고 보람있는지 모르는 이는 어리석다.


68. 지식과 지혜는 전혀 다르다. 가장 지식이 많은 이가 가장 지혜롭지 않을 수도 있고, 가장 지식이 없는 이가 가장 지혜로울 수도 있다(물론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없겠지만). 지식이란 개념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는 것인데, 인간이 만든 개념이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언젠가는 무너지거나 수정 보완되어야 할 것들이다. 지혜란 그 개념을 얼마나 잘 이용하면서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바꾸거나 무너뜨려야 할 때 얼마나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느냐, 즉 자명하게 아는 것과 불확실한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히 알고 나눌 수 있느냐를 말한다. 지식은 행복과 거의 관련이 없지만, 지혜는 행복과 직결된다. 소크라테스도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공자도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을 끝까지 검증하지도 않고 확실하다 여기고 의심을 품지 않으며 산다면, 그는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졌더라도 허상 속에 사는 것이며 이미 정신이 굳어져 박제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그 자명하지 않은 지식들이 점차 무너짐으로써 그 위에 세워졌던 그의 세계도 위태로와질 것이다. 반면에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체험으로 검증하는 사람은, 항상 새로운 세계를 살게 되므로 노자가 말하듯 항상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 오래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과학 등의 학문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을 진리 혹은 학문 자체라 믿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중대한 착각이며 학문을 망치는 일이다. 그가 갖고 있는 지식은 학문의 발전 과정에서 얻어진 중간 부산물들이며, 언젠가는 검증하여 고치고 버려야 할 것들일 뿐, 학문의 본질은 그 "지식들"이 아니라 계속 새로운 지식을 발견해 나아가는 그 과정에서 쌓여가는 "지혜"인 것이다. 지혜를 길러주지도 못하고 지식에 고착되어버린 학자는 후배학자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 쉽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기 쉽다.   


69. 많은 사람들은 물건, 돈, 지위, 권력 등을 사랑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사람을 이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이용하고 서로에게 이용당하며 불행해진다. 그러나 어떤 조건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사람을 사랑하고, 그러기 위해 물건, 돈, 지위, 권력을 이용하거나 포기할 줄 안다. 모두가 그런 세상이라면, 행복이 떠날 날이 없을 것이다.


70. 뭔가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건, 그것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일 수록 아름다울 것이나, 그것이 세상을 망치고 스스로를 망치는 일이라면 더없이 추할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거나 무엇 하나에 완전히 빠지기를 갈구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래야 마음이 하나로 모여 근심이 사라지고 잔잔해져 참나를 느끼며 열반락에 가까운 쾌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사랑을 하거나 어떤 대상에 대한 전문가나 오타쿠들이 되는데, 그 사람들은 그 분야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열반락을 계속 얻기에, 적어도 그 분야에 대해서는 물질에 대한 집착과 온갖 근심과 두려움(돈에 대한 집착은 두려움의 결과다)에서 벗어나며 삶의 의미를 얻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는 열반락의 모조품일 뿐, 삶 전체를 열반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기호와 기질을 적절히 이용하여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고 양심을 드러냄으로써, 참나를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언제나 실천을 통해, 그리고 실제로 세상을 양심적으로 바꿈으로써 누구나 언제든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이것이 텅 빈 진리가 현상계에 장엄하게 펼쳐지는 "화엄"이다). 즉 양심에 대한 전문가, 양심에 대한 오타쿠가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근심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에 없느니, 근심의 근원인 욕망을 열반락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항상 이겨내기 때문이며, 불경에 "깨어있는 자는 염라대왕도 어쩌지 못한다"거나, 공자님의 "(양심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씀은 이를 가리킨다. 도대체 이들에게 무엇이 두렵겠는가? 나를 부끄럽고 약하게 하는 것은 (양심에 어긋난) 욕심이고, 나를 당당하고 강하게 하는 것은 양심이다.


71. 실전 때는 연습 때보다 보통 못한다. 연습은 실전보다 더 엄격하게, 가능한 한 모든 상황에 대비해서 해야 한다.


72.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갖고 있는 것들보다 못한 사람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한, 그들을 보며 안도하고 안주하여 그들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은 죄악이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어떻게 역량 안에서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하고 실천하며 그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선업이다. 양심, 신의 관점에서 인간은 하나이니, 몸의 일부가 고통받는데 나머지 비육한 일부가 희생하지 않는 상태를 병이라고 하듯,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 그것에 감사하며 남과 나누지는 못할 망정 스스로 잘났다 여기며 갖고 있는 것을 지키는 데에 힘쓴다면, 그 사회는 혈액 순환이 안 되어 썩어 죽을 것이요 그 사람은 물질적으로는 풍족하게 한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악업은 언제 다시 다 갚을지 모를 것이다. 인과를 진실로 안다면, 그렇게 양심에 죄를 짓고도 죗값을 피하리라 여기는 것이 돌을 물에 넣고 떠올라라 기도하는 것보다 더 허망함을 알 것이다. 가졌다면, 그것을 현명하고 즐겁게 나누어라. 물론 자신을 희생하며 당장 다 내주라는 말이 아니라, 역량과 상황 안에서 최대한 나도 살고 남도 사는 길을 언제나 찾을 수 있으며, 유마경의 유마가 큰 부자이면서 동시에 큰 보살이듯, 많은 성현들이 권력자의 모습으로도 와서 훌륭한 정치를 펼쳤듯, 양심을 더 깊이 아는 영성 혹은 인격이 높을 수록 더 큰 재산과 권력과 재능으로 더 많은 사람을 현명하게 도우면서 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욕심은 오직 세상을 돕는 데에만 두고, 그 과정에서 얻는 재물과 권력과 재능과 시간과 젊음과 몸은 양심의 사업을 돕도록 자연이 나에게 주신 재료들이라고 여기자. 일꾼이 작업도구들을 사사로이 쓰거나 숨겨두면 반드시 벌이 내린다. 자신에게 주어진 도구와 재료, 역량과 상황에 맞게, 차근차근 주변부터, 나도 살고 남도 사는 길을 찾아 나아가자. 그 길이 섭리 즉 양심에 맞다면 그에 따라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인격은 성장할 것이요 나머지는 하늘, 자연, 신이 도우실 것이다. 양심과 섭리의 물결에 타고 있는 한 그 섭리가 나를 받쳐줄 것이며 나의 언행이 섭리의 극히 일부나마 세상에 드러낼 것인데 무엇이 걱정이며 무엇이 두렵겠는가. 이 물결에 거스르는 자는 엎어질 것이요 따르는 자는 떠오를 것이다.


73. 무엇이든 억지로 하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하고, 이루어도 엉성하며, 이루는 데까지 너무 많은 값을 치루어야 한다. 과정을 즐기던 것들도 결과에 대한 요구가 생기면 억지로 하게 되니,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마음, 지금에 집중하는 마음이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낸다. 무엇이든 진심으로 즐겁게 할 수 있는 마음은 텅 빈 마음 뿐이며, 이 마음에서 모든 유혹을 물리칠 힘이 나온다. 마음을 무엇에도 나누지 말고 하나로 모아라. 무슨 일을 하더라도 거기서 시작하고, 거기서 끝내라. 그 자리가 알파요 오메가인 자리이다.

인터넷 글은 하루 종일 읽으면서 책은 잠시도 읽지 못하는 건, 대부분의 독서가 시험이나 스펙을 위한 것, 혹은 지식을 얻어내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배우려는 마음 없이 책을 읽고, 몸을 만들려는 마음 없이 운동을 하고, 배 채우려는 마음 없이 밥을 먹고, 특히 착한 일을 하려는 마음 없이 선을 행하거나 사랑받으려는 마음 없이 사랑을 할 때, 그 대상의 요체를 바로 보며 그것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마음에서 사랑이 나오며 무엇이든 해낼 힘이 나온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결과를 강요하지 말라. 그 결과를 얻기도 힘들지만 얻더라도 그 댓가로 무언가를 사랑할 힘을 버려야 할 것이다. 요즈음의 교육이 하는 짓이 그러하다.


74. 선행을 해야 한다고 역량에 맞지도 않는 일에 뛰어들어 괴로와하는 것은,   마치 사원이 시키지도 않은 일에 임원처럼 마음대로 매달려 일을 오히려 그르치고 자신도 망치는 일과 같다. 딱 그날 그날 텅 빈 마음, 양심에 시키는 퀘스트를 시키는 만큼만 뿌듯하게 하라. 티내지도 말고 더 잘하려고도 하지 말라. 그러면 더 큰 역량과 임무가 주어질 것이다. 양심 사업을 하는 신의 회사에 취직한 겸손한 신입 사원처럼 배우고 행동하라. 선업을 짓는 것은 에고가 애를 쓰는 것이라기보다는 양심의 자연스러운 발현을 에고가 옆에서 조금만 거드는 느낌에 가깝다. 어떤 운동이든 서투른 사람은 힘을 많이 쓰지만 익숙해지면 최소한의 힘으로도 편안하게 하는 법이다. 신 앞에서는 바보가 되어라.


75. 양심에 따르는 사람, 마음을 내려놓은 사람은 현실 세계에서 재미있고 보람있는 일이 무한하고 해야 할 일도 무한하니, 게으를 틈도 심심할 틈도 걱정할 틈도 공상에 젖을 틈도 없다.


76. 앞서 양심사업을 하는 신의 회사에 취직한 신입 사원처럼 선을 행하라고 했는데, 신입 사원에 걸맞는 일을 하되 경영자나 소유주의 마음으로 내 회사다 생각하고 행해야 하며, 그렇다고 신입 사원의 역량에서 벗어난 일을 해서도 안 된다. 말하자면 에고는 신의 몸을 이루는 하나의 세포로서, 각자의 에고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안에는 본래부터 완전히 같은 신의 DNA, 참나, 불성, 성령, 양심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것이 에고의 무지와 아집, 그것으로 인한 수많은 업 때문에 제한되어 나타날 뿐인 것으로,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하겠다는 DNA에 새겨진 신의 사업, 천명을 자신의 사업으로 받아들인다면, 본래 우리 각자가 신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며 깨지지 않는 충만감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 상태에서는 세상을 "큰 나"라고 여기며 아름답게 경영하는 마음이 되니, 설령 자기 에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을 양심이 시키더라도 그것을 억울해 하지 않으며 기꺼이 하고 희생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선에는 복이 온다"고 하나 그 복은 세상의 복이지 채워질 리가 없는 에고의 욕심을 잠시 채운다는 뜻은 아니며, 복을 바라고 하는 행위는 진정한 선행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천명에 몸을 맡겨 살다보면 "나"의 범위가 점점 확장되어, 그만큼 자유롭게 살아도 걸림이 없어지고 큰 역량과 큰 일이 주어지니, 점점 큰 성현 군자 보살 도인 등이 되는 것이요, 말하자면 신의 사업체에서 승진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기 살겠다고 주어진 양심을 제대로 행하지 않거나 남을 해치는 이는 이상세포나 암세포로 비유할 수 있는데, 이런 이들은 다시 욕심을 비우고 정상세포가 되지 않는 한 면역세포들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우주가 사라지지 않는 한, 악업은 그에 맞는 결과를 부르며, 그것이 천명을 어길 때 주어지는 천벌이다.


77. 도인 군자 보살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거나 감정 변화가 없어도 되는 고요한 환경에서 사는 이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슬픔이든 기쁨이든 분노든 자연스레 감정을 표현하나 그것이 양심에서 어긋나지 않는 이다. 파도타기의 달인은 잔잔한 바다만 찾아다니는 이가 아니라 그 어떤 거친 파도 위에서도 휩쓸리지 않고 흐름에 맞춰 오르락 내리락하며 길을 찾아내어 조화를 이루는 이다. 감정을 두려워 말고, 다만 양심에 맞고 적절한지만 살펴라. 양심에 맞는 감정은 인간으로서 누리는 축복이다.


78. 그 누구도 그 어떤 일에 대해 완벽히 결백하지는 않다. 인간은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분명 어떤 문제에라도 책임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며 산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다만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문제에 대해 "나는 잘못 없으니 반성하거나 분석할 일도 없다"는 마음은 곧 인격의 퇴보를 의미함을 명심해야 한다. 주변의 모든 일에 대해 양심으로 성찰하여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그래야 인격은 유지 혹은 성장한다. 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결백하지 않다.


79. 해서 옳은 일이라면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라. 결과는 나를 약하게 할 뿐이다. 결과에 안주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그냥 주변과 나누거나 잊어버려라. 얼마 안 있어 죽을텐데 지고 갈 것도 아니다. 항상 몸과 마음을 가볍게,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과정에 충실하라. 모든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지상의 것을 탐내지 않으면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적 충만함을 얻을 것이다("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너희는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지 말라"). 욕심은 사람을 약하게 하고, 양심은 사람을 강하게 한다. 욕심 없는 자는 사기 당하기도 어렵다.


80. 유혹에 자꾸 빠지는 것은 사실 유혹을 이길 마음조차 제대로 먹지 않았기 때문이며, 유혹에 빠지는 것이 어떤 악업이 되고 죄가 되어 어떤 값을 치르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알면 그리 살 수는 없다. 유혹에 관대해지지 말자. 텅 빈 참나의 힘으로 유혹을 관조하고 매순간 이겨내라. 언행으로 안 드러났으니 악한 생각만 잠시 한 것은 괜찮겠지, 하지 말라. 큰 죄도 항상 발단은 자그마한 생각이고 그 싹일 때 자르지 못하면 금새 자라나 잘라내야 잘라낼 수가 없어 자아를 바꿔버리니, 예수님도 겉으로만 율법을 따르는 자들을 악의 자식이라 불렀으며, 중용에도 아무리 사소한 것도 겉으로 다 드러날 것이라 하였다. 은밀한 생각으로라도 죄를 짓지 말며 죄를 지었다면 반성하라. 유혹을 이겨내면 자유로와질 것이고 유혹에 지면 노예가 될 것이다. 유혹으로 시간과 재능을 낭비하는 것은 중죄다.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반대로 말하면, 선한 생각 하나 하는 것만 해도 업이 바뀌기 시작하니, 생각부터 경영하라. 생각을 관찰하고 경영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며 다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


81. 세상 일이 마음대로 안 된다고 불만스러워 하지 말라. 그렇게 따지면태어난 것부터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용에 자신의 희노애락만 적절히 경영할 수 있으면 성인이라고 하였듯이, 순간마다 자기 마음부터 잘 다스리도록 하라. 어차피 우리는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비친 세상만 볼 수 있으며, 달리 말하면 평생 자신의 마음만 보다가 그것이 마음인지도 모른채 죽는 것이다. 또 어떻게 보면 내 마음 속에 들어온 이 세상은 이미 내 세상이니까, 어떤 바둑 국수가 "내 바둑이니까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듯이, 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만들 책임이 있기도 하다. 신의 책임을 나누어지며, 내 안에 들어온 세상에서 신의 뜻을 펼치는 이는 신성하다.


82. 신의 명령은 오직 사랑과 정의를 진심을 다해, 지혜롭게 펼치라는 것 뿐이다. 모든 성인의 말씀 또한 요약하면 그것 뿐이다. 그것만이 살 길이며 살 만한 길이다.

사실 선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 과정을 내가 감히 이해하기로는, 그리고 말로 표현하기로는 다음과 같다. 
- 모든 현상은 이원적이며, 이원이 가능하려면 모순률 이전의, 말할 수 없는 일원이 있어야 한다.
- 그 일원에서 만물과 에고가 모두 나왔기에, 에고의 이원성을 내려놓으면 일원에 가까운 마음, 참나를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원적인 현상계가 모두 사라지지 않는 한, 에고가 스스로를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고는 일원성의 無, 태극의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에고와 만물과 참나는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참나, 일원성의 無에서 나왔으며, 벗어나지 않는다. 에고도 따로 없고(我空), 만물도 따로 없다(法空). 마치 영사기의 청정한 빛(참나)에서 필름의 나와 남이 모두 스크린에 비쳐 생겨나는 것과 같다. 생각, 감정, 오감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완전히 없앨 수도 없다. 단지 최선을 다해, 일원성의 無에서 나오는 지혜로, 순리에 맞게 경영할 수 있을 뿐이다. 
- 그 일원에서 선과 악 또한 나왔는데, 선(善)만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선만 있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라 일원만 있는 상태, 철저한 무(無)이며, 이원적인 현상으로 선이 드러나려면 필연적으로 악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악 자체는 영원하다.
- 일원성의 無로부터 이원성의 현상계가 나온 이상, 에고와 선악은 필연적으로 나타나며, 현상계가 단절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법칙인 인과율에 의해, 에고의 선업은 더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에고의 악업은 더 악하고 추한 세상으로 돌아오므로, 에고는 선을 택할 수도 악을 택할 수도 있지만, 마치 법을 지킬 수도 어길 수도 있지만 어기는 경우에는 처벌을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결국 악을 이겨내고 선을 택하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다. 앞서 말했듯이, 선만 있는 현상계란 불가능하므로, 악을 이겨내고 선을 행하는 에고가 있어야 비로소 선이 선으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며, 애초에 에고가 창조된 이유 또한 無 안에 있던 善을 현상으로써 드러내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일원성의 뜻을 이어받아 세계의 일부, 에고의 마음에 비친 세상만이라도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책임을 지는 존재,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의 닮음꼴" 존재가 에고이자 생명이다. 에고를 없애고 안식을 얻는다거나 악업을 짓더라도 죗값을 피한다거나 하는 다른 길들은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다. 받아들여라. 영원히, 그리고 모두가 선업을 지어야 한다. 선한 세상을 각자의 마음에서 창조해야 한다.


83. 모든 인간관계는 양심을 바탕으로 맺어야 한다. 욕심으로 인간관계를 맺다보면 어느새 주변은 서로 뒤통수칠 기회만 엿보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의 말, 욕심이 담긴 말은 믿지 말고, 양심과 진심이 담긴 말들만 골라내어 그 안에서 자명한 것을 취하라.


84. 한 번만 읽을 책이나 금방 유행처럼 잊혀질 책은 사실 안 읽어도 별 지장이 없는 책이다. 그 시간에 고전을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읽어라. 그 글을 쓴 성현들의 영적 수준은 훨씬 높기에, 읽을 때마다 영적인 진보와 지혜를 이룰 수 있다. 밑줄 쳐가면서 읽으면 다시 읽을 때 훨씬 편하니 책 아끼지 말고 밑줄이나 포스트잇을 활용하라. 책은 사서 걸레처럼 써라. 책을 모시고 살 게 아니면, 걸레처럼 만들어서 머릿속에 새기는 것이 책으로서 의미가 있다. 욕심으로 고시공부를 밑줄치면서 하면 일정한 확률로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겠지만, 양심으로 고전공부를 마치 고시공부하듯 열심히 하면 반드시 누구나 성현이 될 수 있다. 매일 명상하고 매일 고전을 읽으며 성찰하라. 안 읽어도 사는 데 별 지장없는 책들은 그렇게 열심히 읽으면서, 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과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공부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왜 없는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와 대화하는 것이고, 깨어서 읽는다면 그것만으로 육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수준이 높을 수록 일상에서는 이루기 힘든 진보를 빠르게 이룰 수 있는, 훌륭한 수련을 하는 것이다. 경전을 걸레가 되도록 밑줄치며 읽어라.


85. 사실 양심에 맞느냐 안 맞느냐는 몸이 먼저 미세하게나마 알아채고 반응한다. 그 자명하고 찜찜한 느낌, 상쾌하거나 울컥한 느낌을 절대 놓치거나 무시하지 말고 원인을 분석하라. 그 느낌이 어두운 미로에서 구해줄 밧줄이다.


86. 견성, 확철대오, 참나를 보고 안착한다는 것은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어떤 급박한 상황에서 감정과 생각이 요동치고 요동칠 수 밖에 없을 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알아차리는 자리가 있음을 안다는 것에 가깝다. 항상 마음을 고요히 하려면 결국 아무도 없는 산 속에 숨어들 수 밖에 없으며 그런 공부는 세상에게나 자신의 양심에게나 별 도움 안 되는 공부다.


87. 욕심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욕심꾼들의 욕심 놀이에 끼어 놀아나지 말고 그들을 깨우칠 궁리를 하라.


88. 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말을 하는 목적, 즉 상대를 변화시킨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에 맞게 정말 다양한 버전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를 안다는 것에는 정보와 지식을 자명하게 하는 것과 함께 사람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언행을 택하는 능력도 포함되며, 이것이 인격의 수준이다. 


89. 자산의 중요도는 목적 자체거나 그것과 직접 관련된 자산, 한 번 잃으면 되돌릴 수 없는 자산,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자산, 별 필요 없는 자산 등의 순으로 나눌 수 있다. 물질적인 자산 뿐 아니라 삶의 요소 또한 그런 식으로 나누어보면, 참된 나 자신, 즉 양심, 사랑과 정의가 가장 본질적인 자산이자 목적이며, 한 번 잃으면 되돌릴 수 없는 자산은 가족과 친구 등의 인간 관계와 나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 시간 등이 있다. 돈이나 지위, 평판, 권력 등 다른 자산은 살아가는 데 필요하지만 어디까지나 더 소중한 가치들을 위해 쓰일 때에 가치를 제대로 가지는 자산이며, 그런 상위의 자산을 위해 쓰이지도 않으면서 갖고 있거나 오히려 상위 자산들을 하위 자산인 돈 등을 위해 희생하여 가치를 전도시킨다면 그의 삶은 결국 무가치하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하위 자산을 궁극의 자산으로  교환하라.


90. 한 우물만 파라. 여러 우물을 파야할 때도 한 번에 한 우물만 파라. 언제까지 파냐하면, 희열이 끊이지 않을 때까지 파라. 위대한 이들은 예외없이 그렇게 했고, 한 분야의 매니아였다. 책을 읽어도 그 페이지만 찢어서 읽는 것처럼 읽어라. 읽으면서 언제 다 읽지, 라거나 다른 페이지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몰입이 안 되면 몰입할 대상을 몰입력보다 줄여라. 가령 책이 너무 두꺼워보이면 그 한 페이지만 하루나 며칠 동안 보겠다, 마음먹고 보라. 목표가 커 보이면, 그저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그 날의 목표를 세우고, 어제와 같이 오늘에만 충실한 것을 목표로 삼아라. 투수로서 공을 던질 때에는 타자와 관중을 마음에서 없애고 연습 때처럼 미트와 공만 생각하라. 전의 투구와 앞으로의 투구는 생각하지 말고 지금의 스트라이크만 생각하라. 점차 몰입력이 커질 것이다. 곁눈질하지 말고, 고기를 먹을 바에야 가장 맛있게 먹어라. 지금만 있는 것처럼 사랑하라. 신도 작은 미물까지 최선을 다해 다양하게 만드는데, 그것들을 대할 때에 어떻게 최선을 다해 즐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은 무관심하지도, 무표정하지도 않다. 심지어 숨을 쉴 때에도 한 숨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호흡수행의 요체다.


91. 사람은 역경과 사지에서 살아남으면 크게 성장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통 그 상황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저절로 깨어나게 되며, 참나의 힘을 빌리기 때문이다. 즉 이 원리를 안다면, 굳이 사지까지 가지 않아도 명상과 성찰로 항상 깨어서 산다면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런 이들은 역경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92. 바둑은 대국 후에 복기하면서 그 실력이 느는 것처럼, 인격은 일상에서 복기하듯 수시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성찰하면서 는다. 양심, 사단, 육바라밀에 비추어 성찰하라.


93. 원시 사회에서는 근력과 민첩성이, 문명화될 수록 지식과 지능이 가장 강력한 아이템이 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아이템일 뿐, 그것을 선을 위해 지혜롭게 쓸 수 있도록 하는 캐릭터의 스탯은 철학, 인격, 양심과 영성의 수준이다.


94. 마음이 자명하지 않고 걸림이 있으면, 경맥 또한 막혀 기운이 돌지 않으며, 그 상태가 지속되면 병을 얻는다. 몸을 제 기능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을 티없이 자명하게 움직여야 한다. 스스로와 하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당당한 마음에서 가장 맑은 기운인 호연지기가 나오며, 사람인 이상 양심에 비추어 한 점도 부끄러움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맹자의 말씀대로 최대한 인의예지의 양심에 따라 살면서 호연지기를 잘 기르는 이는, 자연히 군자 즉 임금이 될 만한 리더로서 주변의 기운과 사람을 끌어당긴다.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자신들도 모르게 그런 큰 사람들, 성현들, 군자들, 보살들의 양심적인 언행과 맑은 풍모 등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지혜에 이끌려 함께 마음이 움직이고 자명해지며 변화한다. 군자는, 비록 그가 임금이 아니라 떠돌이 수도자거나 목수거나 석공이거나 동네에서 글 가르치는 선생이거나 백수거나 노예거나 거지더라도, 그런 식으로 호연지기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며, 이렇게 변화된 세상은 모양만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수준이 높아진 것이어서 그 때에 뿌려진 선업의 씨앗은 또다른 씨앗을 낳아 수백 수천년간 이어진다. 그렇게 맑은 호연지기는 이런 마음가짐 없이 몸에 좋은 먹이만 찾아 먹거나 산 속에 들어가 수행만 해서는 닦을 수 없다. 자신의 경맥을 양심으로 뚫는 것과,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경맥과 사람 사이의 막힌 경맥, 세상의 막힌 경맥 또한 뚫는 것은 함께 해야 할 수행이며 자연히 함께 이루어질 수행이다.


95. 천재나 주변의 재능있는 이들을 시기하거나 그들과 경쟁하려 하지 말라. 사람마다 재능이 다른 것은 서로 베풀어 도우며 살라는 뜻이지 어거지로 모든 면에서 같게 맞추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왜 누구는 개미로, 누구는 사람으로 태어났겠는가. 서로 나누면 큰 시너지가 될 재능들도, 자신이 타고난 분야가 아닌 분야까지 뛰어들거나 이기기 힘든 타인을 시기하고 경쟁하면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갈등의 씨앗, 음의 시너지, 악을 행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각자에게 주어진 재능을 그에게만 내린 선물이 아니라 주변이나 인류 모두에게 내린 선물로, 그 천재를 그 선물을 가져온 배달부로 바라보라. 그리고 나 스스로도 어떤 선물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으며, 그 선물을 어떻게 세상과 나눌 것인지 돌아보라. 이 세상에서의 삶이, 각자의 선물 보따리를 풀어 나누며 가르쳐주고 그 열매를 즐기는 축제가 된다면 어떨까. 천재나 주변의 재능있는 이들, 그리고 자신의 소소한 재능이라도 감사히 여기고 배우며 보람차게 쓰자. 


96. 

몸은 평생 탈 대체불가능한 자동차이고, 뇌 (사고와 감정과 감각)는 평생 쓸 대체불가능한 컴퓨터이니, 당연히 평생 잘 유지 보수 및 업그레이드해야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것들은 삶의 가장 중요한 도구는 되어도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이니, 도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하면 허무하다. 본체는 오직 사고와 감정과 감각의 바탕에 있는 존재 자체와 그로부터 나오는 나와 남을 가르지 않는 마음, 양심 뿐이다.

97. 성인聖人은 항상 명상에 들어있는 자도 아니고 어렵고 복잡한 지식을 말하는 자도 아니며 어떤 일에도 폭력을 쓰지 않거나 분노하지 않는 자도 아니고 신기한 재주가 있거나 얼굴만 봐도 아우라가 흘러넘쳐 사람들을 감복시키는 자도 아니다(성인들의 악에 대한 분노와 저주나, 성인들이 대중들에게 받은 수모와 모욕을 생각해보자. 제멋대로 선과 성인을 상상하고 그 환상을 향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평범한 이들보다 재능이 뛰어날 필요도 없으며 그들처럼 생각하고 느끼면서 살되, 오직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와, 선악의 각각에는 그에 합당한 결과가 반드시 따라온다는 법칙만큼은 확실히 알고 그에 따라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 성인이다. 이 법칙은 글로 외우거나 믿는다고 해서 안다고 할 수 없으며, 마치 어린 아이가 중력의 법칙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수없이 넘어지고 걸으면서 중력의 법칙을 몸에 익혀, 결국 낭떠러지에서는 누군가 떠밀어도 절대 뛰어내리지 않듯이, 한 번 데인 아기는 뜨거운 불에는 본능적으로라도 절대 손을 넣지 않듯이, 그렇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양심에 비추어 자신을 성찰하며 몸에 익혀, 악을 행할래야 도저히 행하기 힘든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선악의 법칙을 알게 된 것이다. 선악을 안다고 아무리 입으로 떠들어도 몸이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안다고 떠드느니만 못하다. 명상도 물론 필요하고 가끔은 깊이 드는 것도 좋지만, 그리고 성현의 말씀은 좋은 교재가 되지만(성현의 말과 글은 영성계의 과학교과서와 같다. 성현의 말과 글을 되새기며 체험하면 훨씬 빨리 정신이 성숙해진다), 평상시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돌아볼 수 있을 만큼만 깨어있으면서 수시로 선악을 판단하고 성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체험과 성찰로 선악의 법칙을 본능에 새겨라.

98.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정말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없다. 공짜가 가능한 세상은 조금도 유지되지 못한다. 만약 공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자신의 무지와 아집의 명백한 증거다.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요행을 바라지 말라. 자신의 언행에 합당한 책임을 달게 져라. 한 번에 잘 하려고도, 바꾸려고도 하지 말고, 안 된다고 조급해하지도 말라. 꾸준히 선업을 뿌리고 가꾸면 그대로 거두리라.

99. 개념과 체험으로 확실히 확인되지 않은, 즉 자명하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은 맨몸으로 지뢰밭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100. 자책은 아집이요 오만이다. 그동안 안 되던 게 한 번에 될 리가 없으며, 그동안 쌓아온 업이 한 번에 정화될 리가 없다. 자책하기보다는 실패를 분석하고 조금씩 수정해 나아갈 발판으로 삼아라. 자책은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겠지만, 길어도 몇 분 안에 끝내고 개선점을 찾아냈다면 명상으로 놓아버리고 잊어버려라. 잘못을 했다면 한 번에 완전히 받아들여 뉘우치고, 잘못에 해당하는 결과만 피하지 말고 달게 받으면 되지, 질질 끌고 있을 이유가 없다. 갖고 있어봤자 도움 안 되는 기억은 그냥 놓아버리는 게 낫다. 바꾸고 나아지는 건 한 번에 될 리도 없으며 은근히, 꾸준히, 여유있는 마음으로 바꿔 나아가야 한다. 먼 거리를 걸어가려해도 매일 밤을 새서 걸어 빨리 도달하려는 자보다는 하루에 충분히 걸을 수 있을만큼만 걷는 자가 더 빨리 도착할 것인데, 하물며 삶에 걸쳐 걸어야 할 길이라면 과욕은 없느니만 못하다. 더구나 그 길이 양심을 추구하는 길, 진리를 찾는 길이라면, 아무리 목표가 양심이라 해도 그것에 과욕을 부리는 것은 양심의 소리보다는 자신이 세운 양심이라는 허상을 따르는 것으로 전혀 양심에 맞지 않는 역설인 것이다. 양심에 따르는 길에서 에고의 의욕이 양심을 가리면 안 되며, 에고는 힘을 빼고 양심의 발현에 그저 관심만 주면 될 뿐이다. 양심은 생각만 해도 뿌듯하고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 길은 즐거워야 오래 걸으며, 고통스러운 길은 잠시 자기 만족과 우월감만 줄 뿐 오래 걸을 수가 없다. 그냥 차라리 과욕을 부려 안될 일을 되게 하려고 애쓸 시간에 생각 없이 티비나 보며 머리를 맑게 비우는 편이 낫다. 오늘 할 수 있는 만큼만, 그게 아무리 작아보여도, 어제보다 나아진다면, 그리고 그 작고 즐거운 진보가 지속된다면, 그것만큼 확실한 길은 없다. 길은 걱정 있는 곳이 아니라 즐거움과 보람 있는 곳에 있다.

101.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티를 내지 말고,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남에게 선행을 하라고 강요하지 말라. 아무리 좋은 행위와 말이더라도 남과 나 사이에 벽을 쌓는 결과를 낳는다면 좋아 보이던 일일 뿐 진정으로 좋은 일은 아니며 독선이 되기 쉽다.

102. 욕망을 부정하지 말라. 절대 자신이나 남의 꿈을 비웃거나 자기 비하 혹은 자학에 빠지지 말라, 특히 금욕과 절제를 핑계로. 반성이 아닌 자기 비하는 방종만큼이나 오만한 태도로서, 욕망 또한 자연과 신의 섭리 안에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생명은 좋아하고 바라는 바가 있으며, 그것을 자신들이 멋대로 상상한 선의 기준에 맞추어 억지로 억눌러서는 안 된다. 자연과 신은 죄를 짓도록 함정을 파놓고 사람들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는 사냥꾼이 아니다. 각자의 개성과 욕망은 억누르라고 주어진 과제가 아니라, 그것을 조화로우면서도 다양하게 펼치며 세계를 만들어가라고 주어진 재료에 가깝다. 그 욕망이 남이나 자신을 해치는 정도가 아닌 이상 오히려 장려되어야 하며, 좋아하고 바라는 일을 추구하는 중에 그 방식과 정도를 주변과의 조화에 맞게 끊임없이 조정해나아가며 그 조화 자체에 대한 지혜, 道理에 통하고 주변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격의 성숙이지, 타고난 기질과 욕망을 억눌러 모두 같도록 만드는 것은 흔히 형이상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이들이 저질렀던 오해이자 퇴보였다(또한 반대로 욕망을 무한 긍정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시크릿'류의 기복 신앙도 심각한 오해이자 퇴보인데, 욕망의 긍정이 조화를 깨트리도록 방치하여 결국 타인의 욕망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금욕과 기복, 이러한 욕망에 대한 두 상반된 태도는 사실 조화나 양심에서 어긋난, 제어되어야 할 욕심의 양면일 뿐이며 기성종교가 타락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도인은 아무것도 안 하고 산 속에 들어앉은 자거나 반대로 위대한 권력자여야 할 필요가 없으며, 차라리 노래를 좋아하고 잘 하는 이라면 노래로 사람들을 평화롭게 하고, 짐승을 잘 잡고 요리를 잘 하는 자라면 고기 요리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자에 가깝다. 자신의 기질과 욕망을 진지하게 인정하고, 주변과의 조화를 해치지 않도록 타협하면서 추구하도록 돕자. 자아는 버려야 할 물건도 아니요,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조화나 양심에 어긋나면서 방종에 빠질 때에는 엄격히 다스려야 할 때도 있지만, 조화를 해치지 않는 욕망이라면 진지하게 이루도록 돕기도 하면서 길들여 나아가며 결국 세상을 바꿔나아갈 아바타 혹은 동반자라 할 수 있다. 욕망이 조화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살짝씩만 안내해주면, 그 욕망은 조화의 결을 타고 오히려 더욱 순조롭게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다. 양심은 욕망의 반대가 아니라 욕망을 오히려 도우면서 바람직하게 커 나아가도록 하는 부모 같은 마음이다. 즉, 자아를 성숙시키는 것은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아서,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할까봐 꽁꽁 묶어놓고 키우거나 완벽을 기대하면 오히려 비뚤어지지만 평소에는 하고싶은 일을 하도록 자유를 주되 바른 길에서 벗어날 때에만 조금씩 바로잡아주면 올바로 크듯이, 자아를 고정관념 속의 "올바른 자아"의 모습에 맞추어 다그친다면 오히려 아집과 무지에 더 빠지게 되지만 자아가 하고 싶은 일을 그 때의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한 편안하게 하도록 풀어두면 양심과 대화하면서 올바르게 자라게 된다. 단지 잡념과 죄의 싹만 잡초처럼 올라올 때 뽑아주어라.

103. 창조성과 지혜는 더 많은 지식을 얻는 데서 오기보다는 오히려 갖고 있는 지식을 깨 나아가는 데서 온다. 인간이 만든 것은 완벽하지 않고 지식과 개념 또한 그러하니, 언젠간 깨어져야 할 사이비 진리인 지식과 개념은 습득한 그 때부터 진짜 진리로 계속 나아가는 데에 장애물이 된다. 지식과 개념을 얻었다면, 그것이 정말 자명한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빈틈을 찾아내면 미련없이 부숴버려라. 고정관념에 갇힌 순간 성장은 멈추고 이른바 "꼰대"로 불리우는, 자신 뿐 아니라 남들의 성장까지 가로막는 이가 된다. 물질적으로는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록 더 근원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듯이, 마음에서는 자신이 가진 개념과 관점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록 더 근원적인 진리로 다가선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지식과 개념은 꼭 필요하지만, 그것은 그것을 깨어나가면서 성장하기 위한 재료로서 쓰일 때 진정한 의미가 있을 뿐, 그것을 맹신하지 말라. 지식은 지혜의 성장을 막는 껍질, 벗어야 할 허물이다. 노자가 항상 부드러워야 늙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고정관념을 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를 하든 책을 읽든, 상대방이나 작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와, 자신의 생각과 언행에 대한 진심을 담은 반성이다. 창조성은 양심에 충실할 때,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주려고 고민할 때 풍부해진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왜 만들었는지 떠올려보자.

104. 삶에서 변하지 않는 정답은, 양심만이 답을 알고 있다는 것 뿐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그 때의 상황마다 다른 답을 양심이 내놓을 수 있다. 따라서 언제나 양심에 접속하라, 즉 깨어있어라. 깨어있는 자에게 복이 있다 하였으니, 선정을 익혀 깨어있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선을 행하더라도 고정관념에서 나온 선이기에 사이비이며 위태롭다. 도인은 옛 제도와 방식에 충실한 이가 아니라, 아무리 과거에 훌륭한 제도나 방식이었더라도 오직 양심에 충실하여 지금 맞지 않으면 포기하고,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을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그 때마다 행하는 이다. 비록 그 방식이 때로 완전히 새로와 보이더라도.

105. 무엇을 하든, 숨만 쉬고 있든 일을 하고 있든 누군가와 싸우고 있든, 살아있는 한은 항상 6바라밀 중 하나 이상은 하고 있어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주는 일은 선정, 지혜,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의 여섯 덕목 뿐이다(꼭 육바라밀로 표현하지 않아도 인의예지신이나 사랑과 정의 등 종교별로 양심을 표현하고 있는데, 다 비슷한 말이다). 세상에서 쓸모있는 사람, 나와 남 모두 항상 윈윈하는 사람이 되어라. 절대 고립을 자처하지 말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남 모두를 이롭게 하고자 한다면 길은 있으며, 그 마음이 어떤 위기도 극복하도록 도울 것이다. 그 길을 찾는 재미에 미친 사람, 그래서 어떤 역경도 그 길을 공부하는 자료로 쓰는 사람이 군자나 보살이다.

106. 군자나 보살은 비난과 갈등과 싸움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싸움이 필요할 땐 잘 싸우고 그 싸움을 나와 남의 양심 성장의 기회로 이용하는 사람이다. 사람 사이에 비난하고 싸움이 때로 일어나는 것은 어찌 보면 여름에 태풍이 불어야 맑은 가을이 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107. 자신을 알라. 자기 자신을 온전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그게 가능하지도 않다. 자신에 대해 안다는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내면에 대해 깊이 팔 수록 놀랄만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며,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만큼 그것이 고스란히 세상 사는 지혜로 이어짐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의 내면은 무한한 지혜의 원천이며, 죽을 때까지 알아가야 할 하나의 우주, 실제 우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우주다. 실제 우주의 블랙홀 같은 현상에 대해 알고 죽든 모르고 죽든 그 사람 삶에는 별 의미가 없지만, 자기 자신의 내면에 무한히 광대한 영역이 있음을 알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확실히 슬픈 일이다.

108. 어릴 때의 하루와 젊을 때의 하루와 늙었을 때의 하루는 같은 하루가 아니다.

109.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은 대다수의 사람에게서 다르다. 그것을 같게 하려면 최소한 절대 다른 일이 싫어 좋아하는 일로 "도피"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잘한다고 평가해준다고 해서 영혼없이 따라가며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잘하는 일을 좋아하게 만들든, 좋아하는 일을 잘 하게 만들든, 선택에 따른 책임이 무거운 줄은 알고 온전히 져야 한다.

110. 명상은 참나, 양심과 더 잘 접속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어디까지나 진통제일 뿐 치료제는 아니다. 진정한 치료는 실제로 현실 세계를 선이 그대로 구현되는 세계로 바꾸었을 때 이루어지며, 명상은 그 때 필요한 지혜를 얻기 위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서만 의의가 있다. 명상에만 빠져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자칭 수도자들의 마음은 성스럽지 않으며 오히려 이기적이다. 명상만 잘하는 고립된 사람보다, 명상을 전혀 몰라도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이름없는 이가 더 숭고하며 양심, 섭리, 신의 뜻에 가깝다. 명상에 더 깊이 빠져들려고 노력하지도 말라. 오히려 명상을 방해할 뿐이며, 양심 수행은 더욱 더 방해할 뿐이다. 그저 아무 일 없을 때에는 명상이나 성찰, 공부가 잘 안되면 차라리 취미활동이나 TV시청이라도 하며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여 잡념이 잡초처럼 자라지 못할 환경을 만들어주고(불안은 잡념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도록 하는 좋은 토양이다), 평소에는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릴 정도만 집중하면 된다. 다만 명상으로 마음을 비운 상태가 되었다면, 반드시 그 진통상태를 즐기기만 하지 말고 형이상적 문제(양심은 어떻게생겼는지, 마음은 어떻게 생겼는지)나 현실의 문제에 대한 답을 생각하라. 고정관념에서 가장 많이 벗어난 그 상태야말로 지혜를 늘릴 절호의 기회다. 잡념이 많은 평소에 하는 생각은 그저 고정관념에 의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편견 가득한 결론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11. 행복은 질이 중요하다. 물질로부터의 행복이 아니라 진리, 양심으로부터의 행복을 추구하라. 오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보다는 진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아라. 성인이 오감이 만족된 행복한 삶 대신 못에 박히더라도 진리에 따르는 희열을 택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것이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다. 예를 들어 청각이 발달한 기질의 자아가 청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음악을 한다고 하더라도, 청각만 만족시키는 기술적 음악보다 양심과 인간미가 담긴 음악이 기술이 아닌 예술이 되어 더 깊은 감동을 준다. 결국 오감도 더 차원 높은 만족을 얻으려면 진리에 가까워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잘 먹고 예쁜 것을 보고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며 즐거운 감정으로만 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자아의 오감과 감정도 행복하고 진리를 따르면서 세상도 행복해지는 경우가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자아의 오감의 만족을 포기하더라도 진리를 따르라. 그것만이 자아 또한 궁극적으로 구할 것이고, 진리를 버리고 자아의 행복을 추구한다해도 언젠가는 그 값을 호되게 치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112. 성찰은, 말그대로 나를 남을 바라보듯 관찰하며 반성할 때 더 객관적인 지혜가 나온다. 훈수둘 때 더 수가 많이 보이는 것처럼. 자아(에고)는 세상이라는 몸의 세포 하나일 뿐이지만, 보통은 그저 잊고 살며 편견과 무지와 아집을 쌓아가곤 한다.

113. 역경은 양심을 따르는 힘(영성)을 키울 기회다. 역경을 기회로 반전하여 물질적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통받다가 그냥 죽더라도 그 고통을 통해 영성과 지혜가 성장한다면, 혹은 묵은 업을 풀게 된다면 역경은 역경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늘은 의미없이 고통을 주고 엿 먹어봐라 하지 않는다. 하늘은 자아를 공부시키고자 하는 부모다. 그게 진짜라고 안 믿어지더라도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고 공부하는 기회로 삼자. 어차피 온 역경인데 그렇게라도 활용하지 않으면 또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114. 겸손하라. 이 겸손은 틀에 박힌 겸손, 꾸민 겸손이 아니라, 재주가 출중하더라도 그 재주를 보고 사람들이 느낄 불편할 마음까지 역지사지하여 적절히 부드럽게 표현하는, 마치 매우 밝은 불빛이 오히려 불편할 수 있기에 적절히 차양을 쳐주어 모든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비추듯, 재주를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라 재주를 덕으로 감싸 모두를 이롭게 하도록 쓰는 센스 있는 겸손이다. 그러면 이 은은한 빛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 빛을 감응시켜 오히려 홀로 고고한 빛보다 더 아름답고 오래 빛날 것이다. 덕보다 앞서는 재주는 화를 부른다. 쉽게 말하면, 티내지 마라.

115. 선하고 숭고하고 친절하게 꾸민 표정과 말투보다는, 차라리 자연스럽게 화내고 울고 웃는 인간의 표정과 말투가 더 양심적이다. 논어에 교언영색에 인이 드물다고 하였듯이, 선과 숭고함은 그런 식으로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꾸며낸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양심은 자신과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편안하게 한다. 진실되게 행동하고 진실되게 반성하라.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아닌 것이 되려하지 말라. 

116.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는데, 그보다는 기회는 항상 지금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뭘 따로 기다리지 말고 그냥 지금 하고 있으면 된다.

117. 편견에 휩쓸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면, 우리는 각자의 의식, 각자의 모니터에 비친 대상, 세계, 우주만을 알 수 있을 뿐이며, 죽었다 깨어나도 대상 자체, 우주 자체를 그대로 보진 못한다. 이 세상을 나의 의식 위에 펼쳐진 그림, 바다 위의 파도로 보게 되면 아집과 무지가 점차 떨어져가는데, 이는 곧 우주선으로 우주를 구석구석 다니는 것보다, 나의 마음을 구석구석 관찰하고 참나의 입장에서 의식과 주변 대상을 바라보는 편이 더 우주에 대해 깊이 알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세계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 모든 걸 알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알라. 성인들이 우주를 이야기하기보다 마음을 이야기한 이유, 마음을 이야기하다가 그것이 천하에 대한 이야기로 곧잘 넘어가는 이유는, 대우주를 만든 동일한 씨앗이 마음 속에도 있기 때문이며, 소우주인 자신의 마음을 알면 살아가는 데에 충분한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18. 역경에서는 반드시 지혜를 얻고 나와라. 고통만 얻고 끝내지 말라.

119. 무기력한 사람 혹은 탐욕적인 사람, 즉 합쳐 말하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브레이크가 하나 더 달려있는 셈이다. 즉 모든 사람은 욕심을 적절히 제어하고 조종할 양심의 브레이크를 타고나는데, 세상의 강압과 폭력을 겪으면서 양심의 브레이크 외에 "남들의 평판"이라는 브레이크를 자기 마음 속에 무의식적으로 심는다, 혹은 삽입당한다. 그리고 그 후천적 브레이크는 낮은 자존감의 악순환으로 점점 강화되어 양심의 브레이크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여, 자아성찰이나 자연스러운 욕심 같은 양심이 허락하는 욕심도 억지로 제어하는 한편, 양심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욕심을 남들의 평판을 얻기 위해 혹은 낮은 자존감을 외적 조건으로 보상하기 위해 허락하여 인격을 타락시킨다. 자기 성찰로서 이 후천적인 브레이크를 떼어내고 선천적인 브레이크를 회복하라. 무조건 모든 기준을 자신의 양심에 두고,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욕심은 추구하고 양심에 어긋나는 욕심, 즉 나나 남을 해치는 욕심은 싹을 잘라내라. 자아 또한 세상의 강압에 후천적인 브레이크가 채워진 희생자이지만, 그것은 그 자신만이 극복할 수 있으며, 그것을 떼어내고 자유를 얻는 것만큼 인간으로서 숭고한 일도 없다.

120. 그 스스로를 해치는 중독이나 남을 해치는 일이 아닌 일 중에, 매일 똑같은 일을 지겨워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재능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평생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달인이 된다. 매일 똑같은 일을 지겨워하지 않게 하는 힘은 몰입과 사랑에서 나오니, 매일 똑같은 것처럼 보여도 그것보다 뜨거운 삶이 없다. 매일 하면서도 지겹지 않은 일이나, 매일 만나면서도 지겹지 않은 사람이 없는 삶은 뜨겁지 않으며 허무하다. 그 대상이 어떤 일이든, 어떤 사람이든(사람, 삶, 사랑이 비슷한 발음인 것이 필연적인 결과라고 상상해보자.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하는 것이고 삶은 사랑하는 매일이다), 성인들처럼 특정인에 대한 사랑이 아닌 사랑 자체이든, 무언가를 위해 매일 평생을 뜨겁게 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 언제나 몰입하여 마음을 뜨겁게 불태워라. 에고라는 차가운 쇠를 참나의 불덩이에 넣으면 곧 불처럼 덩달아 뜨거워지리라.

121. 한 생각을 하더라도 그 안에 육바라밀, 즉 나눔, 절제, 수용, 성실, 몰입, 성찰이 모두 들어있어야 한다. 빠지는 게 있으면 좋은 뜻이라 스스로 여겨도 나쁜 결과로 나온다. 나누고 수용한답시고 무작정 다 오냐오냐하면 엉망이 되듯.

122. 간단히 말해, 사람의 삶이란 양심을 실천하고 그것을 훈련하는 기간이다. 그리고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양심의 드러냄 또한 많이 부딪혀야 는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양심만으로 헤쳐나가는 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어려운 상황을 마다하지 않는 이가 진짜 삶의 고수지, 말로만 양심을 말하거나 어려운 상황을 피해 안정되고 고고한 곳만 찾아다니거나 어려운 상황에서 당황하거나 꼼수를 찾는 이들은 고수가 아니며 진전이 없다. 

123. 재능과 재물은 결국에는 나눠야 맛이다. 재능과 재물과 행운은 세상에 진 빚이며, 잘 관리해서 결국 받은 것보다 더 많이 세상에 다시 돌려줘야 한다. 돌려준 만큼 인과법에 의해 세상이 더 큰 일을 맡길 것이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재능과, 내가 세상을 위해 재능을 쓴 만큼보다 많은 재물, 나누어지지 않고 쌓이기만 하거나 쾌락을 위해서만 쓰이는 재물은 부끄러운 것이다.

124. 당연하게도 세상은 바라는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각자 바라는대로 움직인다면 세상은 유지되지 못한다. 자기 뜻대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데에서 고통이 나온다. 받아들이고, 바라는 게 있다면 바라기만 하지말고 올바른 씨앗을 뿌려라. 엄정한 인과법만이 세상을 움직인다.

125. 원리를 추구하라, 어느 분야든. 이론과 개념은 누군가 세워놓은 표지판일 뿐, 그게 얼만큼 맞는지도 불확실한 것들이니 그냥 참고만 하라. 모두가 뉴턴이 진리라고 믿는다면 아인슈타인은 불가능하다. 임제스님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하였다. 원리 자체를 파고들어 실험하라. 원리를 알고 그것을 표현하며 그것대로 사는 삶이 의미있다. 궁극적 원리는 하나이지만, 그 원리의 각 분야에서의 응용들, 대화 인간관계 연애 철학 과학 문학 요리 음악 운동 무술 청소 노동 계산 암기 연필깎기 낙서 멍때림 명상 호흡 등등에서의 무한한 법칙을 발굴하여 세상에 드러내는 것, 그 분야에서 가장 자명한 길을 찾아내는 것, 즉 원리에 따라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은 얼마나 보람있고 아름다운 일인가.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126. 집중력은 체력에서 나온다. 몸이 안 좋으면 같은 일도 몇 배 어려워진다.

127. 완벽함을 바라거나 남과 비교하는 마음이 지옥문이다. 가장 좋은 것은 지금 이 순간 지금의 조건에서의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일 뿐, 그 결과를 생각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최선을 방해하는 일이다. 신은 나에게 완벽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단지 사랑과 정성을 보여주기를 바랄 뿐이다. 모름지기 바람직한 부모라면 자식에게 그러하다. 

128. 욕심이 양심에 어긋날 정도로 커져도 그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다. 욕망에 즉각적으로 따르지 말라. 즉각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저축해두면, 특히 그것이 양심에서 벗어나 있던 욕망일 수록, 그 업은 그대로 쌓여 더 높은 수준의 만족과 보람으로 돌아올 것이다. 참다운 인간으로서 사는 즐거움이란 즉각적인 쾌락이 아니라 더 높은 수준의 만족, 깊은 내면의 양심을 울리는 즐거움이다. 절제하라. 무조건 금욕하라는 말이 아니라, 맛있는 걸 먹고 좋은 걸 보되, 양심에 어긋나지만 않게,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게 하라는 말이다. 

129. 인터넷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는 감정은 열등감이며 전염성이 강하다. 뚜렷한 목적 없는 인터넷은 하지 말라.

130. 돈이나 이름보다 시간을 구하고, 그 시간을 써서 지식을 구하고, 지식보다 능력을 구하고, 능력보다 기운을 구하고, 기운보다 지혜를 구하고, 지혜보다 양심을 구하라. 
세상을 움직이는 재화와 권력을 가진 사람보다,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보다, 또는 반대로 세상을 다 버리고 홀로 마음 속 고요한 곳으로 도피하는 사람보다, 겉으론 평범해보여도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하고 경영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만이 자유롭다. 사람은 자기 마음 안에 있는 것만을 자명하게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어떤 대단한 지식을 얻음으로써가 아니라(아무리 대단한 지식이라도 자기 마음에서 체험하지 못했다면 한낱 허상이요 맹신이다), 자기 마음 안을 관찰하고 체험함으로써 얻는 지혜만이 진정으로 자명한 진리이고, 그 진리만이 그를 자유케 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그 지혜, 양심,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보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 중에 더 숭고한 일은 없다.

131. 삶을 복잡하게 하고 일을 꼬이게 만드는 건 욕심이다. 욕심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양심에게 내어줄 수록, 욕심으로 하여금 조금씩 양심에게 타협하게 만들 수록, 삶은 명쾌해진다.

132. 하늘로부터 받은 걸 잘 굴려서 결국 세상에 털고 가는 삶이 깔끔하고 보람있다. 자유는 도피가 아니다.

133. 사람이 위대해지는 유일한 길은 양심에 충실히 따르는 것 뿐이다. 그 어떤 큰 욕심도 양심을 벗어나면 아무도 위대하게 만들 수 없다.

134. 마찬가지로, 시간에 최대한 패배하지 않는 길은, 최대한 뿌듯하고 보람있게 사는 것 밖에는 없다.

135. 보람있고 뿌듯하고 의미있고 치열한 것들은, 사람들은 흔히 그것들이 고통의 양과 비례하는 것처럼 믿지만, 고통이나 쾌락과는 상관없는 것들이고 굳이 따지자면 즐거움의 질,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을 만족과 관련있다. 자학은 선과 관련이 없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의 양심에게 묻고 자신의 길을 가라.

136. 인생에 지혜를 얻기 위한 성찰은 필요하나, 후회를 할 시간은 없다. 

137. 사람들은 흔히 '능력'과 '노력'을 별개로 생각하지만, '노력'이라 부르는 것에 해당하는 집중력, 마음을 리셋하고 관리하는 능력, 인내력 등의 덕목 또한 중요한 능력이며 어느 분야에서나 가장 핵심적인 능력이다. 나의 능력이 어느 분야에 잘 맞는지, 이 분야에서 잘 하지 못하는 것은 그 분야에 능력이 없기 때문인지는 아닌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력이라는 핵심적 능력,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갖추어져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집중력, 마음을 관리하는 능력을 키우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마음 비워보기, 명상이다.

138. 진리는 하나지만, 현실에서는 층위에 따라 또 측면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는 피라미드 같은 입체적인 것이다. 즉 미시적으로 옳은 것이 꼭 거시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며, 거시적으로 옳은 것이 미시적으로 옳지도 않고, 이쪽에서는 당연한 것이 저쪽에서는 당연하지 않기도 한다. 더욱이 우리의 의사소통의 도구인 언어는 더욱 불완전해서, 진리가 입체적이라는 것을 망각한 채 소통에 나선다면 결과는 소통이 아니라 갈등에 이르는 것이 당연하다. 이를 갈등이 아닌 소통으로 만드는 마음가짐은 역지사지 뿐이다.




Posted by SPTO